로마서 강해9 실천과 마음(2:17-29)
(롬 2:17, 개정)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롬 2:18, 개정)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롬 2:19, 개정)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롬 2:20, 개정)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2:21, 개정)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롬 2:22, 개정)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롬 2:23, 개정)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2:24, 개정)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5, 개정)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롬 2:26, 개정)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롬 2:27, 개정)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롬 2:28, 개정)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롬 2:29, 개정)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1:18에서 3:20절까지의 요점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자랑거리
그리고 본문 2:17-20절은 유대인들의 특권을 다루고 있습니다.
17-20절을 요약하면, 유대인들의 특권, 곧 자랑거리가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이것을 쉽게 기억하시려면 여러분의 다섯 손가락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엄지손가락은 유대인이라는 특권입니다. 검지손가락은 율법(토라)의 특권입니다. 셋째 손가락은 하나님이라는 특권입니다. 넷째 손가락은 율법수업(배움)의 특권입니다. 새끼손가락은 율법교수(가르침)의 특권입니다.
유대인의 첫째 유대인이라는 특권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 즉,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모든 특권과 특혜가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특권은 율법입니다. 율법 곧 토라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의 모든 희망이 걸려 있었습니다. 도덕법의 최고표현으로서의 율법은 유대인의 정신입니다.
셋째 특권은 유대 민족의 중심에 있던 율법의 핵심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다신론이나 범신론에 빠져있지만, 자기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랑이 있었습니다.
넷째 특권은 율법의 교훈과 교육 곧 카테키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테키즘은 세례, 입교 등을 받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공식적인 교육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의 먼지나 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생활 속에서 지극히 선한 것과 지극히 악한 것,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했습니다. 율법의 내용을 구분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특권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식과 지혜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다른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19절에서는 “맹인의 길을 인도한다”는 표현이 나오고,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라는 말도 있고, 20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이웃들을 타고난 무식쟁이들, 야만인들로 보았고, 그리고 자신들은 율법의 스승들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우리도 어디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유대인들이 가진 토라처럼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기도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이름,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는 또한 매주 성경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아이들과 순원에게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이 같은 다섯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최고의 성도입니다.
성경을 잘 교육받고, 주님의 이름을 늘 외치며 살고, 가르치기까지 하는 것은 정말 최고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특권들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의식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연히 가져야할 자부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을 가진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토라, 즉 성경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것이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예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교육을 받는 것도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율법 스승이 되는 것도 소중하고 귀중한 축복 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섯 가지를 다 가졌는데도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금까지 이방인들의 죄의 목록을 이야기했습니다. 2:16까지는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마치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의 죄만 보는 유대인들을, 바울은, 피고석으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죄만 다루는 배심원석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자신을 피고석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표면적으로 성경을 붙들고 있다고 해서.. 입으로 “주여, 주여”하고, 성경 공부를 철저히 한다고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해서.. 거기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남을 가르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저의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걸 수 없습니다. 이런 표면적인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의 본질
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다음에 있는 것을 놓치면 신앙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이 21절부터 2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특권과 외식의 껍질을 벗겨 나가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발전은 사람의 성장과 같습니다. 생명체는 자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희 집 큰딸이 6학년입니다. 이제 내년이면 중학생이 됩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무섭게 자랐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엄마의 키를 넘을 만큼 자랍니다.
인생을 지나면서 분명히 정리해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외식의 껍데기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짜는 다 부셔버려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의 알맹이가 성장해야 진짜 성숙한 성도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이 껍데기가 너무나 단단하고, 견고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다섯 가지를 지적한 후.. 거꾸로 뒤집어 하나씩 깨기 시작합니다.
“남들을 가르치는 당신이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평가를 시작합니다. 선생이나 목사라는 타이틀의 껍데기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외식의 껍데기를 깨뜨리는 출발입니다.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성도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발견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우리 자신 또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에게 도적질하지 말라 하는 네가 도적질하는가? 간음하지 말라 해놓고 너는 간음하느냐? 우상 숭배를 증오하는 네가 신전의 물건을 약탈하느냐?” 바울은 유대인들과 우리를 향해서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모습을 지적합니다.
바울 자신 또한 이것으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고전 9:27, 개정)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남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말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부적격자로 판단 받을까 봐 일생 몸부림치면서, 달려가는 운동선수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21-22절의 말씀처럼, 유대인들이 언제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신전 물건을 훔쳤습니까? 기록에 따르면, 외투를 잃은 사람이 법정에 갔더니 법정 판사의 의자 위에 자기의 외투가 깔려 있더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판결을 내려야하는 판사가 도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외식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랍비의 아내가 자기 남편이 어떻게 하는가 궁금하여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여 따라가 보았더니 남편이 간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의 우상 신전에 들어가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적질하면, 거기에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신전을 약탈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보면서 야만적이고, 미신을 믿는, 가장 역겨운 종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가장 천한 종놈들의 집단이고, 이집트 왕이 모래사장에서 일하도록 보낸 문둥이들의 집단이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돼지 때문에 피부병을 앓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나태의 극치이며, 이방신들을 무시하는 것은 무신론이라는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비판과 비난은 거의 다 근거가 없는 것이지만,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자랑하는 율법대로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욕을 돌린 점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다섯 가지의 핵심은 있지만.. 실제 행위가 없는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들이 토라를 통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는데, 토라를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선민이라는 것을 자랑할 모습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배운 대로.. 기도한 대로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더이상 공허한 말 잔치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껍데기를 다 벗긴 후 실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돈 문제에 깨끗해야 합니다. 차라리 손해를 보고, 차라리 가난하게 살지언정.. 절대 불의한 돈에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은 성도로 사는 삶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바로 살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사회가 이루어지고, 우리의 가정과 다음 세대가 바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를 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직한 물질의 씨를 심고 뿌려야 합니다. 부정하거나, 도적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남자들은 이 부분에서 정말 약합니다.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들을 바로 회개하고 마음과 생각을 주님 안에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18에서 3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유대인들은 “이만하면 만점!”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빵점입니다. 여러분의 점수는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체크 해 보기 바랍니다.
마지막 도피처까지 추적해서
(롬 2:25, 개정)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유대인들의 특권에 대하여 바울은 배구 경기와 가은 방식으로 처리합니다. 토스를 해서 공을 띄우면 내려올 때 강스파이크를 합니다.
바울 사도가 2:17-20에서 토스를 하고 21-24절에서 강스파이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을 받아 올렸습니다. 다시 살아난 공이 ‘할례’라는 공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모든 것이 무너져도 안 무너지리라고 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최후 보루, 그들이 마지막으로 걸고 있는 소망이 할례에 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 하나님의 언약에 속해 있다는 표시입니다. 마치 청와대의 출입권처럼 하례를 굉장한 자부심의 대상으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몸에 천국행 패스포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옥의 입구에 서서 하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 지옥에 못들어가게 한다고 유대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할례받은 사람치고 지옥을 볼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명예, 돈, 권력이 다 무너져도 마지막 한 가지 할례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고, 할례라는 특권의 표시만 가지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비판을 합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은 결혼의 표시입니다. 저는 귀찮아서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습니다. 작아서 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결혼반지는 잘 끼고 다니면서, 다른 남자,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간통을 한다면 이 반지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할례라는 도장을 몸에 찍고 다니지만, 거기에 요구되는 행위가 없습니다. 표시는 있지만 행위가 없는 모습을 향해서 바울은.. 그런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말과 함께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 십일조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를 했습니다. 논두렁에 심은 콩 낱알까지 십일조를 한 사람들입니다(마23:23).
하나님의 백성의.. 두 가지 기둥은 마음과 실천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입술은 가까웠지만 마음은 주님과 멀었습니다. (막 7:6, 개정)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진짜 신앙은 행동과 마음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삼상16:7). 따라서 우리는 항상 마음이 살아 있는지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정말 마음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부를 때 마음에 감격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 나의 기도가 올라가고 있는지, 내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감사하고 찬송할 때, 무슨 일을 하든지 내 마음이 살아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신앙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받을 때 가슴이 움직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이 가슴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그분에 대하여 가슴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기도하면 남 앞에서 울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가슴에 울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28절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무엇을 보고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흔한 대답은 “유대인이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온 이스마엘과 아랍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유대인 어머니를 두어야 유대인이다”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난 아이는 어떻게 됩니까? 공식적인 이론에 의하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여인의 아이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을 보았을 때, 유대인의 신분을 부인한 것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그 사람의 가정으로부터 추방할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무엇을 보고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정하고 “어떠한 표면적인 조건으로도 유대인이 될 수 없다. 마음으로 유대인이라야 참 유대인이다”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란 것은 종족이나 율법이나 할례나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적적인 변화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속의 영적인 변화라는 것으로 재규정하고 있습니다.
‘표면적 할례가 아니고 이면적 할례가 할례다.’ 겉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속으로 할례받아야 합니다. 겉으로 신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날들을 정말 바로 살아야 합니다. 미스바가 가득 차는 것보다 제가 더 원하는 것은, 교회와 미스바에 나오는 모든 지체들이 가슴으로 바로 사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이 나와서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가슴에 말씀이 박히기를 원합니다. 정말 마음으로 실천하는 미스바가 되기를 바랍니다.
미스바 여러분, 참 유대인은 족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격과 실천에 근거한 것입니다(창29:35; 49:8). 29절에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바울이 여기서 유대인의 정체를 비판적으로 다르면서.. ‘유대인’의 참된 의미인 ‘칭찬’ 혹은 ‘칭송’은 토라나 할례와 같이 인간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마음의 실천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참 신자는 교인이라는 이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실천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만 인정받는 껍데기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통해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미스바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눔/ 꽃들도(이 곳에 생명샘 솓아나)
1. 당신의 모습에서 칭찬하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2. 유대인이 자랑하는 다섯가지는 무엇인가?(롬2:17-20)
3. 하나님께서 나의 모습을 보신다면, 어떤 부분을 칭찬해 주실 것 같은가?
4.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의식의 형식적인 껍질을 깨고 있다. 유대인
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롬2:21-24)
5.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롬2:25, 막7:6
-롬2:28-29
6.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 칭찬을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
라’(29) 말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행동이나 외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칭찬이 되어서는
않된다.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김의 자
리에 있는가? 사람 앞에서 인정받기 보다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는가? 유대인
처럼 껍데기에 치중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칭찬받는 진짜 믿음의 사
람이 되길 기도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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