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6 인류의 진단 결과(1:28-32)
(롬 1:28, 개정)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개정)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30, 개정)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개정)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32, 개정)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얼마전에 이런 예화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헬스장을 운영하시는 집사님이 암에 걸려서 암투병 중에 있다는 소식입니다. 내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질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침투해 들어오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깐 지나가는 인생이며, 무슨 일을 언제 어떻게 만날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믿음으로 사시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일생토록 죄를 이기지 못한 채 죄의 노예가 되어 사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굴을 캐어 생업을 이어가는 분이 굴을 캐어 껍질을 벗겨 보았습니다. 그런데 굴속에 굴은 없어지고 물고기 한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약 7센티 정도 되는 물고기가 마지막 죽어가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굴이 껍질을 벌리고 있었을 때 물고기가 굴 알맹이를 먹으러 들어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라는 유혹은 너무나 달콤해서 따라 들어가면 쾌감과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 굴을 파먹고 있는 동안 뚜껑이 닫힙니다. 자신이 즐기려고 들어갔지만 결국은 자신이 죄의 노예가 되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멸망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뿌리를 빨리 발견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본문1:28을 보면, (롬 1:28, 개정)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여기서 ‘마음’은 24절의 ‘마음’을 뜻하는 헬, ‘카르디아’와 구별되는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일반적인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더 깊고 본질적인 것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르는 지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실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진리와 단절된 상태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과 관계도 맺는 것이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결과로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성적인 부도덕으로 방치하셨고, 다음으로 성적인 도착(호모섹스)으로 방치하셨으며, 그다음에는 ‘상실한 마음’(타락한 마음)으로 방치하셨습니다.
나이가 적든 많든 부모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잘못을 하거나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을 볼 때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저의 어린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손댈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즐기려는 기준이 있는데, 하나님을 인정하면 그것이 막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는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기를 기뻐합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중심에 앉혀놓고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서 조금씩 밀어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내 마음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이 나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믿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내가 누려야할 자유를 빼앗기고 쇠고랑을 차고 있는 것처럼 답답해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려니 내 마음대로 못하겠고, 하나님을 제쳐놓고 살자니 벌 받을까 찜찜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었습니다. 타락할 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하나님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모습도 바로 이러합니다.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그 재산으로 자기 마음대로 쓰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타락한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토록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신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 합당하지 않는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죄라도 지으면 그 죄가 우리를 속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속박된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고, 죄사함의 은혜를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 흐르는 보혈이 없이는 한순간도 깨끗해질 수 없고, 살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쪽으로 가는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에 달려있습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을 놓치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얽어매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감격스러운 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경건의 비결이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의 뿌리를 더 깊게 뻗어 나가게 만드는 양분이 됨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9절 이하에서는 위와 같은 뿌리를 가진 죄의 열매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22:37,39). 그러나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인간을 미워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합니다.” 본문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미움의 열매입니다.
바울은 죄의 열매를 21가지나 열거합니다. 이것들을 분류하기가 쉽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의 4개로 된 한 단위,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의 5개로 된 한 단위, 그리고 이하에 열거된 12개의 단계가 마지막 단위입니다.
그러나 죄의 목록이 이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바울은 특별히 생각나는 대표적인 죄를 기록하면서, ‘모든’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9절에서는 ‘가득한 자요’ 즉,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이 술어로 나옵니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마치 컵에 물이 차듯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미국산 독사인 작은 방물뱀을 애완용으로 사와서 길렀습니다. 뱀을 쓰다듬어주면 좋아하고, 먹이를 손에 놓으면 그것을 다 먹었습니다. 때로는 주인의 몸을 감기도 하고, 점점 커가는 뱀을 보고 자랑스러워서, 친구들이 많은 시장에 가서 보여 주었습니다. 손가락 끝의 음식을 먹는 것, 물지 않고 몸을 감는 것 등 실컷 자랑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순간 잘못 건드린 주인에게 화가 난 뱀이 주인의 발을 물었습니다. 주인이 기른 독사가 주인의 피로 사망신고를 한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것이 좋아서 건드리고, 쓰다듬고, 좋아하고 또한 즐깁니다. 그러는 사이 그것이 자라서, 어느날 갑자기 물면 죽습니다. 하나님을 두지 않는 것이 마음에 자유를 주는 것 같으나, 실상 죄는 자유가 아니라 속박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그 각각을 구별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 목록은 모든 종류의 악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악은 특별히 타인들의 재산과 안녕을 해치는 죄입니다.
앞의 네 가지 죄가 타인의 재산과 안녕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여기 다섯 가지 죄는 타인의 인격 자체를 범하는 죄입니다.
시기는 탐욕과 관계된 것이지만, 탐욕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시기입니다. 탐욕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가지고 있는 재물에 대한 악한 욕망과 욕심이지만, 시기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덜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탐하게 되는 악한 감정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덜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가 극도에 이르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수군수군하는 것과 비방하는 것은 남의 인격을 살해하는 면에서 동일합니다. 이 둘은 인격암살 죄입니다. 귀에 대고 몇 마디 해서 남을 죽이는 것이 수군수군하는 것이고, 인격을 공개적으로 무시하면서 살해하는 것이 비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이 모든 것은 교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하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삿대질함이 능욕이며, 교만입니다. 하나님에 대항하는 교만이 ‘능욕’입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을 귀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에 근거해서 입만 벌리면 자기 자랑이 텨져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자랑’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라는 것은, 지금껏 지은 악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자꾸만 만들어 내는 자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현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고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공경을 제5계명으로 주셨고(출20:12), 바울도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했습니다.(엡6:4).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헬라어로 이 네 가지는 부정 접두어 ’아‘가 붙어있는 단어들입니다.
‘우매’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경험을 통해 가르쳐 주실 때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을 주셨는데도 사용하지도 않고, 고집하는 것이 우매함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우매가 아닙니다.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가장 총명하지만,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서 우매함을 말합니다.
약속을 어기는 자가 “배약하는 자”입니다.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는 냉정하고 잔인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로마 시대 사람들은 자식이 태어났을 때 약골이거나 기형일 때 죽여 버렸습니다. 사형 선고할 필요가 없는 사람까지도 악하면 죽여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노예가 유리잔을 깨뜨렸을 때 연못에 던져 장어가 뜯어먹게 하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노환으로 고통당할 때 버리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하루에 40-50명을 버렸습니다. 이런 것이 로마의 죄악상이었습니다. 당시에 대도시들의 시민 전체가 검투사들의 싸움을 구경하러 몰려갔으며, 정복된 검투사가 피를 줄줄 흘리며 신음하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이 모든 죄악을 두고 여러분 자신을 살필 때 어디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까? 다 걸리지는 않겠지만, 한두 개 어느 것에나 걸릴 것입니다. 3천만명을 살해한 스탈린도 자기 딸에게는 친절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에게 위의 죄 목록을 주면 자기가 걸리지 않는 죄를 끄집어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수군수군하는 자에 걸리지 않습니까? 비방하는 자에 걸리지 않습니까? 부모를 거역하지 않습니까? 무정하고 무자비하여 때때로 불쌍한 사람을 그저 지나치는 일은 없습니까? 조금이라도 일이 잘되면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여기 어디엔가 걸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죄를 지적받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죄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죄를 지적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절벽으로 향해 갈 때,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리고 가면 절벽을 만납니다.” 이야기해야 합니까? 해골을 그려놓고, 빨간 글씨로 ‘죽음!’이라고 강하게 써야 합니다. 큰 동작으로 차를 막아야 합니다.
죄는 방울뱀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굴이 입을 벌렸을 때 그것을 먹으러 들어가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굴이 입을 닫을 때에 죽는 것처럼 죄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증오해야 합니다. 한 가지 죄라도 처음부터 끊어내야 합니다.
마태복음18:8-9절에 만일 네 손이나, 발이나,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빼어 버리라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범죄한 지체를 가지고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낳기 때문입니다.
(살전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죄는 아예 처음부터 끊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는 분이 십니다. 여러분, 나 자신이 죄를 짓지 않도록 몸부림치십시오. 우리가 가족이, 공동체가 범죄하지 않도록 돌아보고 기도하는 미스바가 되길 바랍니다.
사형죄임을 알고도
3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21가지의 죄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두고 바울은 평가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허용적인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자기만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남이 죄를 짓는 것도 허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심과 심판에 대하여도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지식이 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을 알지만, 죄를 증오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만 지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죄에 대한 진단입니다.
자전거 바퀴에는 여러 개의 살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무리 여러개있어서 그것은 바뀌의 축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21가지의 죄가 나오지만 수백 가지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지탱하고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의 축입니다. 바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지옥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제약을 떠나서 살게 되는 삶의 상태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마음에서 지옥이 시작되고 하나님을 영접한 마음에서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죄를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죄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용서와 회복과 참된 자유가 있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믿고 확실히 붙잡아야 합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미스바 여러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의 복입니다. 다시 십자가의 복음을 바라보고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회복이 있습니다. 고침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주님께 더 가까이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죄의 근원을 뽑아 제거하는 미스바 여러분들이 다되기를 바랍니다.
나눔/ 주는 완전합니다(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요즘 몸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몸 상태를 나누고 어떻게 이겨내고 극복하고 있는지 삶을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2. 당신의 영적인 상태는 건강합니까? 영적건강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방치하고 있습니까?
3. 29-31절은 같은 뿌리를 가진 죄라는 나무에 달린 21개의 열매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과 이웃사랑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죄악의 열매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 안에 어떠한 죄의 열매가 자라고 있습니까?
4. 결국 죄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죄의 노예가 되는 길일 뿐입니다.
죄는 처음부터 끊어야 합니다. 증오해야 합니다. 마18:8-9, 살전5:22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 32절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심을 알고도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남이 죄를 짓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정하심은 사형입니다. 죽음입니다. 멸망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뿌리를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시73:28).
다시 십자가의 복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분안에 있는 회복과 좋은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속에 회복이 있고, 치유가 있고, 고침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생명이 있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내 안에 죄악을 물리치시고, 깨끗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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