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21 의의 종(롬6:12-14)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미국에 계신 어떤 목사님이 자칭 성경 교사라고 하는 평신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성경을 잘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간증하러 나왔고, 나와서 성경을 가르치곤 하였습니다.
그가 간증을 할 때든지 성경을 가르칠 때 가장 중심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치적 진리(positional truth)’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진리를 깨닫은 후 인생의 변화를 받아 너무나 놀라운 은혜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씁니다.
그가 말하는 위치적 진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서 항상 현재 은혜라는 그 위치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처럼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곧 하나님 곁에 앉혀진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에서는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선택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거룩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위치에서 그가 살고 있기에, 그 삶이 보람 있고 은혜로워서, 항상 감격스럽게 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만 벌리면 ‘위치적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위치적 진리가 얼마나 훌륭한지 궁금하여 그분의 삶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분의 삶은 통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술주정뱅이요, 담배 중독자이며, 혈기가 많아서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사랑한 적이 없었으며, 여러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가는 곳마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집을 방문해 보았지만 그 집안 전체가 불경건한 생활을 보여주는 표시가 가득해하였습니다.
그가 위치적 진리를 그토록 강조하면서, 거기에 감격했다고 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변화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삶을 보면 그 진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분에게 “당신이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한 번 테스트를 해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린 받은 자니라”(고후13:5).
칭의는 성화와 직결
6장에서는 3-5장에 나온 우리 위치에 대하여 계속하여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칭의에 대하여 강조한 후에 6:1-8, 39에 거룩한 삶에 대하여 나타납니다. 참으로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순간부터 크든 작든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의 정도는 다르지만 생명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이 같습니다.
전혀 삶의 변화가 없고 아무런 생명의 약동함이 없을 때에는 과연 그가 칭의를 받은 사람인가를 한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6:12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하여 죄로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를 믿는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칭의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죄로 왕노릇하지 못하게 할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러므로’와 연결된 앞의 말씀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죄와 사망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다가도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사망을 통과할 뿐, 사망이 저의 주인이 아닙니다. 사망은 다만 영광으로 들어가는 길이 될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여러분이나 저에게 죄나 사망은 결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으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죄로 다시 왕노릇 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생명과 정의의 통치를 받아야 할 신분이 된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도 어떻게 왕노릇 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 있는 죄는 자기의 보좌 곧 왕의 자리에서 퇴위를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의 자리를 빼앗긴 죄가 우리를 주장할 합법적 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우리를 주장하려 합니다. 죄는 폭군과 같아서 우리의 죽을 몸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늘 끼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려 할 때에 우리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너는 내 주인이 아니다. 내 주인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시다.” 이 말을 선포하며서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이어서 나오는 11절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하나님이 고귀하고 자유로운 위치에 우리를 놓아두셨기 때문에 이제는 죄가 다시 우리를 지배하려 할 때 그것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원문에서는 이렇게 명령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죽을 몸”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죄가 왕노릇 하려는 영역은 우리의 죽을 몸입니다. 여기서 ‘죽을 몸’이라는 말이 자칫 영은 귀하고 소중하며, 육체는 천하고 악하다는 헤라 철학적 이원론의 의미로 보기 쉬우나 그것과는 다릅니다. 헬라 철학에서 영은 이데아에 속하여 늘 맑고 좋으나, 육이 악하여 우리의 영혼이 육의 감옥에 갇힌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육을 천시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구원이란 육체의 감옥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한국인의 마음 속에도 이런 영육 이원론이 들어 있습니다. 육은 썩어 빠진 것이며 쓸데없는 것이라서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신자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이 고귀하므로 그것만을 중심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육 이원론이 기독교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영혼과 육체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 상태는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 자체가 악이라면 예수님이 악을 입으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만 보더라도 육신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블어 낙원에서 사는 것은 영만이 아니라 육과 영이 합쳐진 부활한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좋은 것입니다. 다만 타락한 후에는 육이 죽을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육을 가진 동안에는 신자든 아니든 육이 반드시 한 번은 죽습니다. 그런데 죄는 이 죽을 몸에서 왕노릇 하려 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죄는 육에서 왕노릇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죄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바울 사도조차도 죄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성화에 대한 오해 시정
죄가 우리를 왕노릇 하려는 이때에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가 일격에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겠지만, 죄는 결코 한 번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의 주인은 아니지만, 계속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 몸부림치기에 여기에서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기 전보다 예수 믿은 후에 고민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아예 죄에서 굴복하여 살기에 별다른 갈등이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는 새로운 주인에게 지배를 받고 사는데, 옛 주인이 나를 괴롭힐 때에, 거기에 순간적으로 따르기에 생기는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강드의 과정 속에서 점점 더 거룩해져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를 생각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성화는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칭의는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 또한 이것은 결코 번복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거룩해져 가는 성화의 과정은 단번에 갑작스런 체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고민이 많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련회를 한 번하고나면 그토록 고민하던 죄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수련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기도 하겠지만, 가정생활로 돌아가면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는 전해진 메시지 조차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수련회에서 단번에 죄의 문제를 영원히 처리할 것으로 기대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런 기대만 계속되면 중고등학생, 대학생 시절을 지내면서 계속 수련회를 할 때에 지쳐버릴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은혜받고 쏟아 버리고 하는 이런 반복을 계속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인해 수련회조차 그만두자는 생각이 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과 은사론에 대히여 수련회에서 강의를 듣고 나면 뭔가 번쩍하는 것이 내 몸에 임하여 순간적으로 천사라도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일 뿐 천사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분명히 그 당시는 은혜를 받지만,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계속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수련회 참석하여 말씀의 은혜를 받은 것이 그냥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알게 모르게 영적인 살과 피로 남아 장기적으로 우리의 성화를 돕는 것입니다.
몇 년전 ‘브리티시 위클리’는 편집자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를 제재하였습니다.
‘목사님들은 설교에 상당한 큰 비중을 두고 설교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아주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해 왔고 그동안, 제 추산이 정확하다면, 적어도 3천 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놀라는 것은, 그 설교 중에 단 한 편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시간을 달리 썼다면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를 두고 수 주간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설교 찬반론이 산사태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한 편지가 그 논쟁을 마무를 지었스니다..
’저는 결혼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32,850회의 식사를 하였습니다. 거의 저의 아내가 요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는 그 많은 식사 중 한 끼의 메뉴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식사를 할 때마다 매끼 영양을 공급받았습니다. 저는 그 많은 식사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분명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위의 논쟁은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듣는 것에 관한 것이지만, 수련회에서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롭게 들었던 말씀을 실생활의 갈등 속에서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맛있게 먹은 으믹이 몸의 양분으로 공급된 것처럼 은혜롭게 들은 말슴은 기억과 상관없이 영의 양식으로 공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화는 단 한 끼의 별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별식을 포함한 보통식사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받고 다시 생활에서 갈등하고 하는, 이러한 반복은 우리의 육신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걱정하는 대신, 지금은 내가 넘어지지만 다음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실패하면 끝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나중에 가서는 “내가 정말 신자인가”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의 투쟁을 한번에 끝날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렇게 끝나지 않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결코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과정이며 반복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존경하는 분을 관찰한다고 해도 그 누구도 죽기 전에 성화가 완성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 속에도 아직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매일 반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죄와 늘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옛날에는 죄가 나를 지배하려 할 때 그 죄의 지배를 거부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죄가 나를 지배하려 할 때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거부하면 죄가 일단 물러섭니다.
야고보서 4?7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여기서 명령이 나타납니다. 불신자는 마귀를 결코 대적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그들의 합법적인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는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으므로,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물러서는 것입니다. 성화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과정을 통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진행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해지기 원하지 않는 자기의 마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거룩해지기 원하면 그렇게 순종할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순종한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는 원하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에 나의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내가 싫어한다고 해도 순종해야 합니다.‘
코리템 붐 여사가 한번은 말씀을 증거하고 나서 인사하기 위해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본 적이 있던 독일의 어느 중년 신사가 그 앞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나찌 치하에서 감옥에 있던 자기의 언니를 괴롭혀서, 그 언니를 굶어죽게 했던 그 간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독하고 잔인하게 고문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코리텐 붐 여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세계적인 성녀이지만 그 순간 그의 손을 잡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주여, 저는 저분의 손을 잡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용서해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주님, 제가 손을 내밉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고, 두 사람 사이에 얼음 같은 것이 녹아 내렸습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역사가 거기서 일어났고, 그녀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총을 그 순간에 체험했던 것입니다.
“원하십니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원하시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셋째 “여러분 죄와 싸우며 몸부림치고 계십니까? 죄 짓지 않으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그것은 다 헛됩니다. 아무리 죄를 짓지 않으려 해도 역시 죄는 여러분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죄와 싸우는 투쟁을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라는 메시지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 메시지는 틀렸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라는 그 말속에는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지만, 주님을 바라보면서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순종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와의 투쟁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노릇하려는 동안,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죽을 때까지 포기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넘어진다고 해도 또 일어나야만 합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본문 6:12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죄가 여러분을 지배하려할 때 ’주님, 저는 능력이 없어서, 원하는 마음이 없어서, 은혜가 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불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최고의 합리화 기계가 들어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만 합리화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경향입니다. 아주 좋은 믿음처럼 보이지만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나 순종은 결코 한 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순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시기에,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본다고 하면서 자기의 순종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늘 싸우면서 죄의 욕구를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어서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욕이란 정욕들, 곧 욕심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욕심이 좋은 의미로, 선한 일에 욕심을 부리는 것(밀1:23; 딤전3:1; 히6:11), 하나님에 대한 욕심(마13:17; 눅17:22; 벧전1:12)에도 사용되고, ’먹고 싶다(눅15:16; 16:21), 보고 싶다, 일하고 싶다‘하는 데도 사용됩니다. 이런 욕구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욕‘(에피투미아)는 대개 악한 욕망을 가리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음욕(마5:28),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막4:19), 악한 것에 대한 욕구(고전10:6), 원망, 불평, 자랑, 아첨 등과 관련된 욕망(유1:16), 호모섹스(롬1:26-27), 육체의 열매로서의 욕망(갈5:16, 20-21) 등에 그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요일2:16; 벧전4:2, 3; 벧후2:18). 본문에서의 사욕은 악한 의미를 말합니다.
우리의 죽을 몸 속에는 욕구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발산될 때 악한 욕구가 되어집니다. 자기의 남편이아 아내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성적인 욕구,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과 연결되어 있는 욕구,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며, 정욕대로 행하며 자랑하고, 이권에 의해 탐하는 욕구, 호모섹스에 대한 욕구,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고, 분쟁, 시기하고, 당 짓고 분 내고, 분리하고, 투기하고, 술 취하고, 방탕하는 욕구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죽을 몸 속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런 욕구들의 특징은 충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욕구들을 누를 때 나에게는 고통이 옵니다. 하지만 그것에 굴복하면 순간적인 쾌락이 옵니다. 이러한 순간적인 쾌락을 인하여 사람들은 이 욕구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욕구들의 충동에 순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욕구들에 순종하는 것이, 죄로 하여금 왕노릇 하게 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여기서 지체는 복수로서 지체들을 말하며, 이는 몸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을 몸에는 사욕 곧 온갖 종류의 욕구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몸에는 지체들이 있어서 손, 발, 코, 입, 귀, 눈, 두뇌 등이 있습니다.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릴 수도 있습니다. 신자들도 순간순간 이 두가지 기능성 속에 있습니다.
부부간에 대화를 하면서도 자기의 입을 순간적으로 죄에 바칠 수도 있고,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의 지체를 누구에게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입니까? 아니면 죄에게 입니까?
지체들을 하나님에게 드리라
본문에서는 죄에게 우리의 지체를 바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지 말고, 13절을 보면,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합니다.
인간의 최대의 목적은 순간순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입이 죄를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내 눈이 죄를 향하였는지 하나님을 향하였는지, 내 발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순간마다 점검하면서, 죄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백두산 꼭대기 나뭇잎에 달린 물방울 하나가 동쪽으로 떨어져서 동해로 갈 수도 있고, 서쪽으로 떨어져서 서해로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의 순간마다, 우리의 지체들을 죄에게 드릴 수도 있고, 하나님께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드리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나의 손을 의의 도구로, 발을 의의 도구로, 눈을 의의 도구로, 코를 의의 도구로, 목구멍을 의의 도구로, 입을 의의 도구로, 혀를 의의 도구로, 모든 지체들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순간 의롭게 되어, 칭의를 받은 그대로 끝까지 일직선으로 나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칭의의 순간부터 상향 직선으로 올라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굴곡을 겪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겠습니까? 혹은 삶의 어느 순간에 한번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변화가 있고, 그 다음에 계속 올라가는 선을 그리겠습니까?
제2축복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칭의의 순간에는 그대로 있다가, 성령세례를 받기만 하면 갑자기 상승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결정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이런 경험 후에도 또한 굴곡이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든지 굴곡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큰 감동으로 완전히 상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인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 같은 사람도 있지만, 계속적으로 상승만 한다고 생각하면, 좌절하게 되고 다시 뒤로 떨어지게 됩니다. 분명히 올라갈 때가 있지만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어느 순간에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방언하고 예언하며, 몸이 뜨거워진다고 해도, 그 다음 순간에 천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때가 상승하는 하나의 도약단계가 될 수는 이지만, 거기서는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바로 믿는 사람은 믿기 전으리 상태로 결코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승의 하되, 속도가 다를 수 있고, 굴곡이 계속되면서 성장해 나아갑니다.
야곱과 아브라함의 생애를 관찰해보십시오. 누구의 생애를 관찰해 보든지 거기에는 굴국이 계속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나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합니다. 이런 싸움이 끝나는 것이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의 영은 완전히 성화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서 기다리다가, 주님이 오실 때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다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의 과정이 곧 투쟁의 과정입니다.
왜 하나님께 드려야?
14절의 말씀으 보십시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며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병아리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제 1학년이 된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병아리 파는 곳 앞에서 꼼짝않고 서 있었습니다. 신기하기는 하고 돈은 없는데, 3학년 언니가 나왔습니다. “언니, 이거 300원인데 사자!” 언니가 사지 않겠다고 하는데, 세진이가 울어버려서 기어이 사 왔습니다.
제가 집에 가니 병아리가 삐약삐약 울고 있었습니다. 그 작은 병아리의 소리가 얼마나 큰지, 마치 우리 아이의 우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되었는데 병아리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살아 있었지만, 쓰러져 있었습니다. 건드리면 한참 가다가 ’꾸악! 꾸악!‘ 입을 벌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쓰레기통에 넣을까 무덤에 묻어버릴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성도들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만약 나약하여 죽어가는 성도들을 내가 갖다 버리려 한다면 나에게는 목회자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솜으로 병아리를 싸서 한 시간 동안 씨름하였습니다. 물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약 두 시간이 지나니 한 번 ’삐약‘소리를 냈습니다. 또 한참 지나니 네 번 ’삐약‘을 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즈음에는 계속 삐약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리에는 힘이 없어서 쓰러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왕성하게 먹이를 쪼고 삐약을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뒤로나 옆으로 제쳐 두어도 그대로 있을 만큼 맥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 반복이 우리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것이기에 강약이 반복될 뿐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1) 이것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7:12).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5:13), 의의 기준을 제시합니다(8:4).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출20:1이하).
(2)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령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육체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라고 했는데, 간음하는 것은 육체의 사욕을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3:19-5:21; 갈2:19-21). 이와 반대로 은혜아래 있지 않고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항상 완전하게 행해야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범죄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갈3:10).
(4)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3:13-14).
(5)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가 은혜 아래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8:4). 성령을 따라 살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된 것입니다(갈5:13-1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중생) 마음 밖에 있는 외부적인 규범이 아니라 마음안에 새겨진 내면적인 규범을 행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빌2:12-13).
율법은 우리를 죄의 세력과 횡포로부터 해방시킬 힘이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알게 하고, 죄의 성격을 깊이 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알려주면서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다 주고, 심지어 우리의 죄성 때문에 죄를 더 짓도록 유혹받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본성과 능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안장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아파서 누구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를 불렀습니다. 심리학자는 “선생님이 아프신 이유는 어린 시절에 받은 깊은 상처 때문입니다. 심리치료가 필요합니다”고 했습니다. .사회학자를 불렀더니 그는 “선생님의 문제는 자라실 때의 환경 때문에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고통은 부적절한 환경에서 유발된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경제학자를 불렀더니 그는 “모든 상처의 뿌리는 돈에 있지요. 제가 선생님의 유가증권을 관리해 드리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을 불렀더니 그는 “선생님이 모든 환경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우시면 고통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읽고 기도하시면서 그렇게 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 모근 조언을 받았으나 여전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어린 소녀가 다가왔습니다. “아저씨, 왜 그 안장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안정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신자는 죄의 안정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고, 또 내려와야 합니다. 죄의 안장에 그대로 앉아 있으면서 그것이 은혜 아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은 고통을 가중시키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율법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 충만한 만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랄 수 있고 또 자라야 합니다. 중간에 결코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죄나 사욕에 우리의 지체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순간순간 드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본성과 능력을 은혜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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