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22 순종의 종(롬6장15-23)
(롬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미국에서 목회를 잘하시는 목사님가운데 한 분이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일주일에 설교를 두 편을 하는데, 한 편에 최소한 8시간을 투자하십니다. 저 역시 묵상하는 시간 외에 말씀을 연구하는 시간을 최소한 8시간 잡으려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전하려고 여러 시간 연구하여 컴퓨터에 입력을 시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출력이 되지 않아 어린 시절처럼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내용을 손으로 직접 적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의 활용 가능성과 잠재력은 참으로 무한하지만 제가 활용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그 기능을 다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나마도 말을 잘 듣지 않기에 너무 답답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은 풍성한 것입니다. 그것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실제로 우리가 믿음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적습니다.
본문 말씀은 의의 종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롭다 함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이 아직도 필요한 것입니까? “사망에 이르는 열매, 죄의 종, 너희 지체를 불법과 불의에 드리지 말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들이 왜 여기서 나오고 있을까요? 이는 우리의 신분은 분명히 너무나도 복된 것이지만, 실제 생활 가운데서는 끊임없이 죄와 싸우고 있기에, 현실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짓겠는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엄청난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5장 마지막 절에서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은혜가 왕노릇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 후에 6:1에서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본문에서는 14절과 연결하여,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는 말씀에 이어, “그러므로 너희가 죄를 짓겠는가?”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7:1-6에서 다시 나오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율법에는 할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명령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 항상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명령대로 행하였을 경우 ‘잘했다’고 평가하고 그 결과로 행한 자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율법대로 하지 않을 겨우에는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고, 그 결과로 행하지 않은 자는 자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율법은 죄로 하여금 죄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니다. 폭로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괴를 자극하여 죄를 더 짓게 합니다.
학생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는 소망 수양관으로 가는 길에 ‘사슴목장, 경음기 누르지 말것!’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제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제 손은 자꾸 경음기를 누르고 싶어졌습니다 분명히 누르지 말라고 했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리고 목사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눌러버릴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펄쩔이며 뛰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율법이 하는 역할은 (1) 명령/ 요구, (2) 순수/ 인정/ 축복, (3) 파기/ 단죄/ 저주, (4) 죄지적, (5) 죄자극 이렇게 다섯 가지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이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 곧 칭의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지적은 해 주지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못 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다는 칭의도 할 수 없고 또한 거룩하게 하는 성화도 하지 못합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은 주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에 초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율법은 의롭다는 선언도 못하지만,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느 ㄴ오히려 은혜 아래있어서 의롭다는 칭의의 선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의롭다 하는 선언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죄를 극복하려고 순종하기만 하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손이 말랐기 때문에 내밀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주님, 저의 손이 말랐습니다.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합니다. 주님 그것을 모르십니까?”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의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손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매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명령임과 동시에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그대로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이미 칭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이 우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여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에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하게 차단합니다.
순종과 종
16-18절에서는 이 사실을 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은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아서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제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두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어떠한 것에 대하여 자신을 드려서 순종하게 되면 자신은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 되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됩니다. 이 선택은 양자택일일 뿐 가운데 위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종이며, 어떤 사람은 의의 종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의 종입니다. 아마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죄의 종인가?”
아내가 동창회에 다녀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친구 가운데 한 명은 학교에 다닐 때에 초라하고 형편이 없었는데, 남편을 잘 만나서 굉장한 인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서울대학 교수인데, 남편을 따라서 형편없던 그녀가 멋진 사람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옷을 잘 입는 것에 신경쓰지도 않고, 도덕적 인격적으로 바로 되어 있어서, 자녀들을 잘 교육하며, 아내가 볼 때 놀라울 정도의 변화를 겪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남편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보더라도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고, 인격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저런 사람이 많으면 우리나라가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인격자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이 아내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런 사람을 두고 죄의 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으로 보면 그는 죄의 종입니다.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도 그 주인을 알아봅니다. 나귀도 구유에 음식을 주는 주인을 알아봅니다. 하물며 사람이 그 주인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그가 곧 죄의 종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여기에 우리의 신분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는 죄의 종이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신분의 변화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나오는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말씀이 약간 이상합니다. 죄에게 해방되어 의의 조잉 되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앞에 “너희에게 전달하여 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말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선행 곧 마음으로 순종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인해 의의 종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인간에게 달린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며, 다만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람의 필수적인 특징이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전혀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2분 정도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일주일 내내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의의 종의 특징은 생명이 있어서 생명의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저희 둘째 아이가 왜 그렇게 극성인지 분석해 보았더니, 뱃속에서 이미 엄마의 배를 많이 찼던 경험이 있습니다. 뱃속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세게 차기도 하고, 작게 찰수도 있습니다.
의의 종이 된 사람에게는 분명히 반응이 있게 마련입니다. 적든, 크든 정도의 차이는 여기서 문제삼을 것이 못됩니다.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의의 종들의 필수적인 특징이며 또한 반응입니다.
여기서 ‘본’이라는 것은 금속을 녹여서 그 본에 부었을 때, 거기서 본 모습대로 제품이 되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교훈에는 본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해진 복음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윤리성이 강조된 복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거분들이 만일 그 본 안에 들어가 순종하가만 하면 거기서 작품이 되어서 나옵니다.
기독교에 고정된 교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기독교에는 교훈의 표준과 본이 있습니다. 기준과 정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떠난다면, 아무리 열정이 있어서 잘한다고 해도 바울 사도의 말처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라는 결과를 얻습니다. 우리에게는 고정된 교훈의 표준, 본이 있고, 거기에만 들어가야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물론 교훈의 본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강요하여 그렇게 살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순종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고 자발성이 있습니다. 객관적인 교훈의 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대한 주관적인 마음의 반응이 같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의 종으로서 생명의 존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술과 명령의 조화
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여기서 바울 사도는 종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실상 종이 아니고 자유인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값진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종의 비유를 구태여 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들이 가장 장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종의 비유이기 때문에 종의 비유를 든 것입니다. 독자들이 약하여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인간적으로 종의 비유를 든다는 뜻입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편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여기에서 많은 오해들이 생깁니다. 우리는 앞의 18절과 19절을 조화시켜야만 합니다. 18절에서는 우리의 신분의 조화를 이야기 합니다. 의의종이 되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는 ‘그렇게 하라’는 명령문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서술과 명령의 조화를 놓친다면 우리의 신앙이 비뚤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의의 좋이 되어라고 강조한다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19절만 말하면서, 바로 살아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우리는 율법주의자들이 됩니다. 반대로 18절만 말하면 기독교 복음이 실천이 없는 복음 되고, 값싼 은혜로 전락해버립니다.
우리는 신분상 이미 의의 종들입니다. 반면 우리는 실제 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이중성입니다. 서술과 명령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옷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십자가 배지가 있습니다. 계시록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계14:1). 여러분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저의 이마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배지를 달고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 배지를 달아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할 일은 배지 단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18절과 19절의 조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의의 종이 되었기에 마음대로 살아라”하는 것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18절에서 끝나버리는 복음을 우리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유모 씨와 같은 구원파 이단이 여기서 생깁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에게 이후의 행동은 아무런 책임을 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부도덕하고 무책임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신분의 변화에 따라 실천을 요구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이전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에 같은 점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드린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전에는 부정과 불법에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룩함에 이르기 위하여 의에게 드리는 것이 다입니다.
전에 가던 그대로 간다면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이제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결과는 영생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볼 때 가나안 땅을 100% 차지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져 있지만, 그들이 누렸던 것은 부분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사사기에 줄곧 나오는 말씀대로 “차지하지 못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너무나 풍성한 삶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여기서의 풍성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입니다. 그렇지만 약속된 이 풍성한 살을 누리는 데 있어서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실제로 자신을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에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큰 감방에 사형수들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일부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고, 일부는 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대통령의 특사명령을 받은 사람이 ”죄의 값은 다 지불되었습니다. 이제 자유로이 밖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나는 저 말을 믿을 수 없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것을 믿고 나옵니다.
이제 나머지는 일어서서 감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감방으로 돌아갓!“하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자유인으로 살아남은 사람조차도, 옛 버릇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명령에 따라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사를 내린 사람이 그 등을 치면서, ”너는 자유인이야!“라고 말을 합니다. 석방된 자유인이 심지어 밖에 나오서조차도 감방에 매인 종처럼 살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음으로 이미 사단의 나라에서 불려 나왔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의의 종,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자유인답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하는데도, 우리는 가끔 옛생활을 뒤따라갑니다. 이렇게 살고 있기에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점입니다.
결과적 열매
2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이미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었다고 했었으면서 왜 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말씀이 새로운 것입니다. 이는 곧 옛날 우리는 죄의 종으로 있을 때 자유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어서 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21절을 끌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죄의 문제를 두고 마음대로 죄 지은 결과를 폭로하면서 의의 종으로 바로 살라는 것이 20-23절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죄의 유혹을 늘 받고 있습니다. 죄는 순간적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달콤함을 줍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시적으로 누릴 수 있는 죄악의 낙이 있습니다. 은근 슬쩍 거짓말을 하면 돈이 생깁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순간적입니다. 그런데도 그 때에 갈등을 겪으면서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돌아서는 이유는 결과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을 알기에 거기에서 아픔을 가지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유명한 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동성연애자라는 것이 밝혀졌고, 기타 잘못된 행위들이 밝혀졌습니다. 그때 그는 ”사람이 은밀한 중에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언젠가는 지붕에서 소리를 질러 밝힐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망각하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죄의 종으로서, 의에 대하여 자유인으로서 마음대로 죄 짓고, 마음대로 쾌락을 누리며 죄와 더블어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살았는데, 그 열매와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언젠가는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지붕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확연히 나타날 것입니다.
193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싱클레어 루이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엉커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엘머 겐트리’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는 성겨을 들고 탕탕 치면서 복음 전하는 사람을 ”겉으로는 복음을 전하지만 은밀하게 보면 알콜 중독자, 간음, 도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루이스 자신이 바로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부끄러워 고급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3급 진료소에서 알콜 중독 판명을 받고 그로 인해 죽었습니다. 아무리 자기르 숨겨도 또는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자기를 숨겨도 그 열매는 드러나게 됩니다.
21절을 계속 봅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아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보십시오. 죄가 관영하고 계속되는 곳에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날아갑니다. 우리는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드리면 드릴수록 사람들은 자꾸만 말씀으로부터 빠져나갑니다.
어떻게 해야 바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령의 감동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령의 감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감동하시지만 자기 속에서 자기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비다. 성령의 능력, 성령의 충만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 아래, 은혜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순종할 능력까지 이미 부여받았습니다.
원하기만 함녀 우리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 원한다는 것은 자기의 원이 아닙니다.. 우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건 없건, 나에게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순종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원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살아서 구원이 이른다는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이 쓸데없는 자가 구원을 받았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 아래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에 불의와 불법에 드리던 지체를 돌이켜서 의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드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다 남아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 나의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종으로 내 자신을 드리며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사망과 영생
”그러나 이제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실제로 죄가 수고했다고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노임이며 죄의 품삯은 곧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죄는 품삯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은사이며 선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영생은 우리가 잘한 것에 대한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며 선물입니다.
굴을 거두는 어떤 어부가 껍질을 벗겼더니 그 안에 3.5인치 되는 물고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고기는 거의 빈사상태였습니다. 굴속의 알맹이는 고기 속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굴이 입을 벌린 상태에서 물고기가 알맹이를 먹기 시작했고, 그동안 굴은 껍질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물고기가 굴 알맹이를 마음껏 먹어 배는 부르지만, 나오려고 몸부림을 쳐도 나오지 못하기에 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는 달콤해 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죄를 먹는 동안 껍질은 닫히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을 때부터 마지막 사망은 당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순간순간 사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실존적 사망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때리셔서라도 기어이 바르게 가게 하십니다.
저도 과거에는 이런 삶이 쇠고랑을 차고 사는 것처럼 무서웠습니다. 부흥사의 말씀 주에도 은혜가 될 성 부르면 저는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 일생을 바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면서, 너무나 신나는 삶이 저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지금 이 속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풍성한 영생의 삶이 순간순간 체험됩니다.
실존적 사망의 길을 가지 말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순간순간 맺기를 바랍니다. 꿈을 꿀 때에도 주님을 더욱 알고 싶어 하고, 숨소리도 주님께 드리려는 의의 종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도 없는 은혜, 십자가없는 은혜는 싸구려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자기 사욕의 둥지를 떠나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귀한 은혜입니다. 일생을 희생하는 삶이 여기에 있지만, 그러나 순종의 종에게는 동시에 놀라운 은혜와 풍성한 생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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