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23 율법으로부터의 해방(롬7장1-6)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서도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신자간의 생활에 있어서도 이 갈등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돌아본다면 제가 하는 고백에 대해 동의하실 것입니다. 지난날의 저를 살펴보면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제가 얼마나 율법과의 갈등을 해 왔는지 알수 있습니다. 저는 철두철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시골교회에서 자라났습니다. 주일도 철저하게 지키고 말씀도 철저하게 지키게 하는데, 그 대부분이 이러면 안된다 저러면 안된다 하는 금지 사항들이었고, 지옥 간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는 ‘이러다 지옥을 가겠구나, 차라리 짐승으로 태어났으면 더 편할 뻔했겠다’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바울도 율법과 관계에서 갈등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보통 많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정도였는데,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까지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성이 지나쳐서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는 데까지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일 때에 같이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처단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마스커스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쫓아다녔으니 그 눈에서 살기가 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웃으려고 하지 않아도 눈이 먼저 웃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처다보는 눈빛에서 인간관계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율법대로 사는 것이 정말 기쁨이 었다면 바울의 눈에 살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샬롬이 들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눈에는 살기가 나왔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자유롭기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살고 있었지만 그것은 묶여 있었던 삶이었던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얽매인다’는 것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쇠고랑을 차고 있는 거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아서 이것 저것 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는데 나는 예수를 믿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 쇠고랑을 차고 있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쇠고랑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느낌을 가져본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 얽매어서 눈에 살기를 띠고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서 율법에서 해방 받고나서 이 편지를 쓸 때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쳤을 것입니다. 저도 바울만큼은 감격하지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감격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율법에 매여서 이인생을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가 하고 갈등하고 있었다가 거기서 풀려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일반법의 원리
7장1-6절은 6장 14절의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는 말씀의 해석입니다. 7장 마지막 절까지 율법과의 관계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7장 1절에서 법 아는 사람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지키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니까 일반적인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공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각형 세 각의 합은 180°가 된다는 것과 같은 법을 말하는 공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보편적인 다 알고 있는 공리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너희는 그 법(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하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수사학적 방법입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하는 수사학적 의문문입니다.
법이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만 사람을 주장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살인하면 사형 당하는 법이 있는데 그 살인을 한 사람이 죽어버리면 그 법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시체를 피고석에 놓고 재판하거나 형을 내리는 법은 없습니다. 시체가 형을 반거나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일단 죽으면 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법이 죽은 사람을 절대로 지배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존에프 케네디를 암살한 법인인 하비 오스왈드라는 사람은 한 번도 재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이었습니다. 케네디의 죽음은 미국뿐 아니라 온 세계를 다 놀라게 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암살범은 한 번도 재판을 받은 적이 없고 형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판받기 전에 먼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 사도는 만인이 다 알 수 있는 공리로부터 율법 이야기를 출발합니다. 그가 이렇게 일반적인 원리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 보십시오.
부부법
2절에서 남편과 아내라는 부부법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부부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과의 관계를 남편 아래에 있는 여인의 위치에서 설명해 보고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 남편에게 매이게 되지만 남편이 북으면 그 여인은 그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남편과 아내의 이혼에 관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간혹 아내를 때리는 남편들이 있는데 이것은 고쳐져야 합니다. 제가 어느 기도원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의 얼굴은 불안에 사로잡히고 쫓기고 있는 얼굴입니다. 아이도 같이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그 법에 묶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간통죄를 짓는 것이 되고 음부가 되어 버립닏. 그래서 할 수 없이 매어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남편이 죽고나면 남편의 법에서 깨끗이 해방되고 다른 사람에게 갈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을 관찰해 보면 이상한 것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의 경우는 사람이 죽으면 율법에서 풀려난다고 하고 있음에 비해, 2, 3절에서는 구속받는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이 말은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그 핵심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죽든지 간에 한 쪽이 죽으면 법의 구속이 끊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본론으로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는 ‘너희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첫 번째 포인트입니다. 6장에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을 합니다. 7장에서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일시적으로 집행유예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었다면 우리가 다시 집히면 또 다시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해방은 그런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죽어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는” 것, 죽은은 사람에게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율법에서 철저하게 해방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ㅁ모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십니까? 남자든 여자든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예수를 신랑으로 모신 신부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좋은 남편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5:25절을 보십시오. 남편 중에서 아내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죽음에 내어준 사람이 있씁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어 주셨습니다. 자기의 몸과 생명을 주실 정도의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아내가 아프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혹시 ‘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죽으면 재혼을 해야 하나,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신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내가 얼마나 열렬히 연애를 해서 만난 사람이데 재혼을 할 수 있나, 안되지’ 하면서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편도 생각합니다. ‘내가 죽으면 우리 집사람은 어떻게 할까. 다시 재혼을 할 것인가’하는 생각도 막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아내가 죽어가는 자리에 있다면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전느 그런 사람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
설사 그렇게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마비된 상태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느끼는 고통과는 다른 것입니다.
에베소서 5:25-27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사랑은 정화시키는 사랑입니다. 흠이나 티가 없게 깨끗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남편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내 영혼이 깨끗해졌다, 인격적으로 순화 되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남편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남편을 아주 잘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으면 점점 깨끗해집니다. 그분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없어 거룩한 상태로 점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5:29에는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양한다’는 말은 호보하고 양육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 가정에서도 한밤중에 갑자기 비가 막 내린다고 했을 때 남편이 먼저 일어나서 그 뒤처리를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아내가 항상 먼저 일어나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합시다. 이 때도 남편이 먼저 일어나서 처리를 해야지 남편은 이불 속에 있고 약한 아내에게 도둑을 맡겨서야 되겠습니까? 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내면적으로는 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해주는 것이 보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벽한 상태의 남편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에는 이런 남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정화시키셔서 우리를 흠도 없고 티도 없이 만드시는 남편일 뿐 아니라 우리를 보양하는 남편입니다.
열매
이렇게 귀한 남편과결혼하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서 율법에서 해방된 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4절 하반적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된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공평과 정의와 자비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입니다(사5:7, 16). 두벌 옷이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나눠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열매입니다. 정한 세 외에 받지 않는 것이 열매입니다. 강포하지 않고 무고하지 않으며 받은 봉급으로 자족하는 것이 열매입니다(눅3:8, 10-14).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열매입니다(갈5:22-23).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는 사망입니다.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도 자기의 도덕을 과시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천당을 간다면 나는 천당의 안방에 가겠다고”고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맺는 열매의 끝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 맺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죄를 마음대로 짓는다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소원이 있고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잠자리에 들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주여,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다가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지만 내가 숨을 쉬고 움직이는 동안에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고 싶습니다’하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기 위함이라는 이 7장 4절의 말씀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로이드 존스는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서 율법으로부터 해방 받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7:4에 근거하여 우리가 신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비추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을 했는데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비춰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이 진짜 있는가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기만 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지 하는 것을 본인 스스로 측정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 속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살마이라면 그 사람은 의심할 것 없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런 반응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2:2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은 갓난 아이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열매의 부분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 맺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생각이 내 마음 가운데 정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목사가 되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 목사가 되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전부 사탄에게 내어주고 식학교를 가라 하는 것인데 저는 그런 것은 반대입니다. 그러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세속적인 직업속에 뛰어들어가서 거기서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어느 분야든 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민과 자발
5.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성령에 있을 때라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으로 인한 죄의 정욕들이 들끓고 있는 상태입니다. 율법 때문에 오히려 정욕이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율법 때문에 오히려 정욕이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육의 요소가 있습니다.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뿌리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에 율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육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5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에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 저는 늘 매여서 사는 기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라 예수 믿는 것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민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의 저의 상태를 생각하고 모델을 그려 보면, 율법이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옆에서 계시면서 율법대로 하면 잘했다고 하시고 그대로 못하면 지옥에 가라고 벌을 내리는 분으로 제 머리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개념은 뒤집어져야 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하는 문자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죽을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위에 계시고 그 밑에 제가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관계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보육하고 양육하는데 저의 인생 전체를 가지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시지만 저 위에서도 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총을 무엇으로 보답할까”하고 생각해도 보답할 수 없는 은총을 내리고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위에 계시고 나는 밑에 있고 그 사이에 법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분을 위해서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분에 대한 감격으로 말씀을 지키게 되고 기쁨으로 말씀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이 문자만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밥해, 설거지 해, 자신 낳아!’하는 명령만 하는 문자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삭막하고 괴롭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사랑의 연애편지인데 이것을 저누 문자로 만들어 놓으면 바로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대로 움직이며 사람이 죽을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그리스도가 있고 밑에 내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면, 모든 것을 해도 그리스도를 위한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게 됩니다.
여기에 영의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새것으로 된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면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된 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우리의 귀하신 최고의 남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열매를 날마다 맺으면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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