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19 대표성의 원리(롬5:12-21)
(롬 5:12, 개정)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개정)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5:14, 개정)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롬 5:15, 개정)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롬 5:16, 개정)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개정)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개정)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개정)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개정)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1, 개정)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스포츠경기를 보면, 참 신기합니다. 특히 월드컵과 손흥민이 뛰고 있는 토트넘의 경기를 보고 있다가 우리나라 선수인 손흥민이 골이라도 넣으면 토트넘을 응원하는 관중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열광을 합니다.
한 선수가 골을 넣었고, 국가 대표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나라가 기뻐하고, 한국이 금메달을 땃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손흥민이라는 선수가 혼자 토트넘에서 뛰지만, 한국의 대표선수로 싸운 것입니다. 대표선수인 그가 이기면 한국이 이기는 것이며, 그 선수가 지면 한국이 지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요약
오늘 본문은 10절이지만, 이 구절 속에 인류역사의 축소판이 들어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와 사망의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로마서 3:21 이하부터 칭의의 원리가 나옵니다. 그 바로 직전에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21절부터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씀과 함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이런 칭의의 교리와 함께 4장에서는 믿음의 본질이 나왔습니다. 5:1-11에서는 그 칭의의 축복 속에 화해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화해뿐만 아니라 마침내 영원토록 영광 속에서 살 영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는 천지가 변해도 뒤집어지지 않을 확실한 진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기에 더욱 확실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저 멈추지 않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반석이 나올 때까지 뚫고 들어가서 발견한 진리가 바로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에서는 두 사람의 대표가 등장합니다. 인류 역사 전체가 두 사람 곧 첫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 아담, 한 사람의 범죄 함으로 세상 전체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는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 심판에 정죄를 낳고, 정죄의 결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라디오에서 어떤 프랑스의 통신원이 이런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불란서의 52세 되는 어머니가 26살 난 자기 아들 마약환자를 고치기 위해 아주 애를 썼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고치지 못해서 괴롭고,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총으로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법정에 섰습니다. 어머니는 “내 아들이 자라날 때 너무나 귀염둥이여서 그 재롱을 보고 내 인생의 서러움을 잊고 삶의 의욕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 아들을 내가 죽였습니다. 너무나 괴로워하는 것을 어머니로서 볼 수 없어서 먼저 하늘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판사는 그 어머니에게 1년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고, 방청객들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모정을 이해한 판결이었다고 찬사를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렇지만 우리 아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이제 삶의 의미와 의욕이 없고 목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몸부림을 치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마약중독이라 하는 죄,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죄의 행동, 죄의 습관, 보이는 죄가 아주 심각한 것으로 우리에게 부딪쳐오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뿌리입니다. 죄의 뿌리는 곧 죄의 본성입니다. 죄의 본성은 아담이 범죄 할 때 들어왔습니다. 아담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는 순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를 보면 아주 시시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한 번 따 먹은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시한 것처럼 보이는 죄에 대한 결과로,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이 원리가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셨지만,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시면서, “빠지나 안 빠지나 보자! 빠지기만 하면, 내가 너를 고통스럽게 하마”라고 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마음대로 하나님의 세계를 즐기면서, 하나님 밑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 아래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과 자신의 피조성만 잊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담이 어긴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거역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불순종입니다. 이 죄를 아담 혼자 지은 것이었지만, 인간의 대표로 지은 것이기에 전체가 그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 확인
그러므로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모세 때 들어온 율법이란 그 전에 죄를 죄로 알지 못하던 것을, 이제 죄로 알게 한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는 먼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햇빛이 들어올 때 커텐을 열고 보면 먼지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습니다. 없던 먼지가 생긴 것이 아니며, 있던 그것이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율법이 바로 이런 기능을 합니다.
한 순종으로 의와 생명
그러면 인간의 본성 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옛 아담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옛 아담을 극복하는 길은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자뿐 아니라,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길을 보여주시는 자뿐 아니라,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시는 자뿐 아니라,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우리게 경건을 남겨줄 뿐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줍니다. 복음은 “가서 죄를 덜 지으라”고 하지 않고 “가서 더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이 아담 안에 있으면 죄가 그를 지배하지만,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은혜가 죄를 지배합니다. 이 진리의 뿌리를 설명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은 아담을 통하여 죄가 들어오고, 죄를 통하여 사망이 왔으며, 사망이 죄를 통해 왕 노릇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으로 은혜의 세계가 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분 그리스도의 순종은 의를 낳고, 의는 칭의를, 칭의의 결과로 생명이 왔고, 생명의 결과로 은혜가 왕 노릇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빌립보서 2:6-8을 봅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이제는 생명이 들어와서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불신자의 세계에서는 사망이 죄를 통하여 왕 노릇 하지만, 이제는 은혜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죄를 정복
죄가 사망과 함께 왕 노릇 하던 세계에 은혜가 생명과 함께 왕 노릇하는 놀라운 은총의 세계가 도달하였습니다. 죄가 크면 은혜가 더 커집니다. 죄가 통치하려고 그 세력이 커지면, 은혜는 그보다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가 아무리 커져도 은혜가 그 죄를 정복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통치를 거역할 만한 죄가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강에서 보트를 탈 때, 그 가는 길에 작은 바위가 수면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자칫 보트가 파선하게 된 상황인데, 강물이 확 불어나면 위로 보트가 지나갑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커도, 그리고 그 바윗돌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불어 오르기 때문에 은혜가 죄를 정복해버리는 것입니다.
고재봉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도끼로 다섯 명 일가족을 죽였습니다. 죄의 통치를 받던 고재봉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심령이 녹았고, 마지막에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노래하면서, 간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토록 큰 죄를 지은 사람의 죄를 하나님의 은혜가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은혜가 그의 가슴을 녹이고 생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은 태신자들에게는 죄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죄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기때문에 죄에 대한 감각이 약합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은혜 감각도 약합니다. 죄 감이 깊으면 은혜 감이 역시 깊습니다.
저도 모태신자로 죄감이 약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너무나 죄에 시달렸고, 특별한 다른 죄 때문이 아니었지만 죄감이 아주 강하여졌습니다.
이렇게 고민하고 죄 때문에 몸부림을 칠 때, ‘내가 이렇게 지독한 죄인이기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구나,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는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구나’하고 깊이 부르짓었습니다.
모태 신자의 경우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삶의 어떤 순간에 죄에 대한 감각이 깊어지게 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처절한 타락상을 보게 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토록 지독한 죄로 인해 주님이 피를 흘리셔야 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의가 들어오고, 의의 결과로 칭의가 들어오며, 칭의의 결과로 생명이 들어오고, 은혜가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말을 롬5;21에서 하는 것은 6장부터 나오는 윤리의 문제와 관계있습니다.
우리 개인은 끊임없이 무너집니다. 저도 넘어지며 여러분도 끝없이 넘어집니다. 애를 써도 넘어지는 것을 매주 봅니다. 그러나 넘어질 때 우리가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시94:18),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 자신의 죄보다 주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에 그 은혜가 저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기어이 저를 사로잡아서 주의 은혜 안에 머물게 만드시고, 지금도 갈등이 있고 넘어질 때가 있지만, 주의 은혜가 저를 붙잡기 때문에 제가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갈 수 있는 것도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뿌리에서, 두 대표로 말미암아 사망의 통치과 생명의 통치가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서, 본문에서 우리에게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의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확실하게 들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지지만 그리스도는 이기십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넘어지는 거을 볼 때 괴로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기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씀하십시오. 나는 넘어지고 있지만 주님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순종을 완벽히 하셨기에 지금 부활하셔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나는 넘어지지만 주님은 승리하셨다. 나는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지만 십자가는 든든히 서 있다. 주님은 승리하셨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신앙을 건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의 집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총의 승리, 이것에 근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다 무너져도 하나님의 은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 진리를 항상 기억하면서, 주님의 승리와 은혜의 왕 노릇 함을 순간순간 체험해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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