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20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롬6:1-11)
(롬 6:1, 개정)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2, 개정)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개정)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4, 개정)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5, 개정)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6, 개정)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개정)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8, 개정)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개정)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0, 개정)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1, 개정)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존 뉴톤은 10대 초반에 영국의 노예선에서 승무원으로 탔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아프리카 백인 노예상의 흑인 아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그 선장의 흑인 아내에게 온갖 학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을 주지 않아서 흑인 부인이 먹고 남은 음식을 주워 먹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땅에서 얌이라는 감자 종류를 파내어 먹을 만큼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런 존 뉴톤이 노예생활에서 풀려나고, 현지인들과 오래 같이 살다가 자신이 선장이 되었습니다. 선장이 된 이후로 그는 온갖 방탕한 생활을 다 했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생활을 다 동원하여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이 드디어 어느 날 기적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니다. 회심한 후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나와 같은 난봉꾼, 하나님께 삿대질하던 자’를 하나님의 백성 삼아 준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찬송가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가 후에 런던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묘비를 썼습니다. ‘한 때 불신자며 난봉꾼이던 나, 아프리카 노예들의 종인 내가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로 인해 보존되고 회복되고 용서받았다. 그리고 내가 한 때 그토록 오랫동안 파괴시키시를 원했던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감격스럽게 전파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찾아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극적인 경함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바라기는 우리가 그러함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 넘치게 더 범죄?
로마서 5장 20절부터 보면, (롬 5:20, 개정)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1, 개정)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죄가 아무리 강해도 은혜가 더 강하여 결국 은혜가 통치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은 오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절의 오해 곧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가 등장합니다.
3-5장에서는 칭의, 곧 의롭다 함을 받음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6-8장에서는 의롭게 사는 삶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의롭게 사는 생활로 넘어가는 이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5장에서 은총이 더욱 넘친 은혜의 승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들은 사람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하는 논리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주장을 할 때마다 반대를 많이 겪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당한 것이었습니다(행15:1-2, 5, 9-11, 12-29, 21:28-36).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전했을 때,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공격을 하는지, 바울을 아예 죽여 버리려 했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조차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행전 15장에서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그대로 이방인들에게 전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심각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다른 한편으로 반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기에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은혜가 넘칠 것이기에 죄를 더 짓자는 묘한 이론이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초두에 등장하는 이론입니다.
제정 러시아의 통치가였던 로마노프 가에 라스푸틴이라는 종교 보좌관이 있었습니다. 높은 사람 앞에서서는 죄를 지적하기 싫어집니다. 조찬기도회 같은 경우는 복음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자리입니다. 거기에서도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참 담대한 사람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런 높은 자리에서는 설교자는 떨게 되고, 그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 하게 됩니다. 기업인이 모이든 정치가들이 모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높은 사람이 모여 있을 때에는 바른 설교를 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 방송에서 어떤 장로님이, 지금은 목사님이신데, 일제 강점기에 장로님이라는 신분을 지켜서 감옥에 가신 분에 대한 방송을 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목사님이시지만,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셨습니다. 한번은 취조실에서 취조를 당하는데 형사가 “이 세상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천조대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장로님은 “우리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꼭 믿어야 천당 가나?”라고 형사가 또 물었답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천당 갑니다.” “그러면 일본 천황은 천당 가나, 못가나?” 이 순간에 주님께서 하신 “너희가 잡혀갔을 때에 거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아라! 그때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실 분이 계신다! 그분은 성령님이시다”하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막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그때 그 장로님은 “저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장로님은 우선 천황이 지옥 간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괴롭힘 당하지 않고 맞고 그냥 나왔다고 합니다.
대답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당하지 않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담대히 말할 수 있을까요? 높은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할 때 참 힘듭니다.
로마노프 가의 라스푸틴 종교보좌관은 왕가의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보통 죄인이 되면 하나님께 보통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큰 죄인이 되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제정 러시아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편안하면 잠을 자게 됩니다. 권력이 많으면 잠들고, 돈이 많으면 잠들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죄성이 있기에 편안하면 타락합니다. 편안할수록 우리에게는 따가운 말이 필요합니다. 따가운 말을 달갑게 들어야 잠을 덜 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라스푸틴 같은 사람의 달콤한 말을 들은 그 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라스푸틴의 이야기는 반율법주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자세히 들어보면, 한쪽에서는 율법주의를 전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반율법주의를 전합니다. 대개 율법주의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우리를 불안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의 반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합니다. 그 결과 늘 편히쉬어 자세에서, 죄를 짓고도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메시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저도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극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때때로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쪽에만 집착하여 하나님만 전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반대 중의 하나가 반율법주의의 공격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은혜를 넘치게 하려고 죄를 더 짓겠느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여기서 ”거하겠느냐?“는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거한다는 말은 가끔 씩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계속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빠지는 죄가 있습니다. 본인이 약하여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거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천막 치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헬라어로는 ‘머문다’는 것으로, 삶의 패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습관적으로 짓는 이 죄를 끊임없이 지을 수 있겠는가? 은혜를 더 풍성히 하려고 죄 안에 집을 짓고 살 수 있는가?’ 하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말이라면 우리에게 해당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거한다’는 것은 오히려 죄 안에 거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2절에는 이 질문에 답변이 나옵니다. ”그럴 수 없으니라“ 단호하게 바울은 말합니다.
헬라어 표현에서 이것(메 게노이토)은 가장 강력한 부정을 말하고 있습니다.(3:4, 6, 31; 6:15; 7:7, 13; 9:14; 11:1, 11). ”우리가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죽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 속에 죄에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 나의 무엇이 죽었는가에 대해 해결해 주는 부분이 6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옛사람이란, 우리가 일평생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기 전의 우리의 상태가 바로 옛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상태는 예수님을 믿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옛사람은 죄의 몸입니다. 그 몸 자체의 특징이 죄라는 뜻입니다. 죄에 의해 지배받고 조종받으며, 죄에 의해 통제받고, 일생토록 주관당하는 그러한 몸, 그것이 바로 죄의 몸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 믿기 전, 중생하기 전의 생태입니다.
그런데 죄에 지배받던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어버렸습니다. 죽은 표시로 세례를 받습니다.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 합니다. 참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확인하고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영적 세례의 표면적인 표시입니다(마28:20; 고전1:13-17; 6:15, 17; 갈3:27; 엡4:5). 바울은 여기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한 것(딛3:4-5)을 가르치기 위해서 물세례의 유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세례가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이라 합니다. ‘합하다’는 단어의 뜻은 ‘속으로’(에이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세례를 받아 들어간 우리는“이란 뜻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연합과 일치의 의미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거은 모세와 하나 되고, 모세와 연대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곧 모세가 지도할 때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을 말하고, 모세가 받은 축복을 전부같이 받는 것을 말하며, 아예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와 동일시, 연합, 연대관계에로의 진입을 말합니다. 이것은 운명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 전체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매장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돌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연합된 것입니다.
6절을 다시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라 하여 과거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죽어도 보통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을 때에 철저히 죽었습니다.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 매장입니다. 어떤 이들은 매장하기 전에 관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매장되고 나면 다시 나오지 못합니다. 4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매장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는 한번 죽습니다. 두 번 죽는 법이 없습니다. 10절을 보면,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한번이지만 모든 것을 위한 영원한 효과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세례를 받아 들어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말하며 이는 곧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못 박혔으며, 그분이 매장될 때 같이 장사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으신 것은 단번에 죽으신 것이기에 우리도 단번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분과 함께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이 곧 죄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이라 합니다.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종조릇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사망이 주장하고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 주장권이 없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악독한 통치자라 해도 공동묘지에 들어간 사람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죽은 후에는 통치권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다시 재판하겠노라고 해도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통치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을 전하다가 저의 인생이 끝난다고 해도 사망이 저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불신자에게는 사망이 주장하지만 이제는 사망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로 통치권이 인양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지 않고 그리스도읭 생명에 동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죽음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분의 생명의 능력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그리고 화해하고서도 거룩해지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찰스하지).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지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 합니다.
죄와 사망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매장당할 정도로 단번에 완벽히 죽었습니다. 다시 반복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에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은 6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로서, 죄에 대하여 종노릇하는 삶을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죄에 대해 종노릇하던 상태가 끝나고 새생명 가운데 사는 자로 통치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는 생명과 은총, 죄와 사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된 자로서 전자에 대해서는 살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죽었습니다(시40:3; 겔18:31, 36:26; 고후 5:17; 갈6:15; 엡4:24).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들은 그 나무가 포도나무이고 또한 살아 있는 나무라는 표시만이 아닙니다. 포도는 포도나무의 존재 목적이고 존재의 결과입니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아 새생명을 소유하고 다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도덕적인 모순입니다. 우리의 새 생명은 옛 생명이 개선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신의 생명이 이전된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포도나무로서 새로운 포도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실생활의 갈등 해결
여기서 끝나면 이론은 좋지만 실제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 우리는 죄의 통치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죄에 순간적으로 굴복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는 먹고 살기가 바빠서 죄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체면 때문에 죄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 바에는 권력과 힘을 부리며 떵떵거리며 살아야 하겠다는 것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 개의 밭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이 주장하는 밭이고, 하나는 하나님이 주장하는 밭입니다. 그 두 밭 사이는 길 하나의 차이입니다. 옛날에는 사단의 밭에서 쟁기로 밭을 갈기도 하고 김을 매기도 하고 씨를 뿌리기도 하고, 추수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다른 쪽 밭에서 죽었기에, 하나님의 밭으로 왔습니다.
그 사이가 길 하나 차이이기에, 저쪽 밭에 있는 주인이 가끔 이쪽으로 소리를 질러댑니다. ”여기 봐라!“하고 부르면서 화려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쪽 밭에서 일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저쪽을 바라보면 너무나 화려하여 거기로 주의가 가서, 정신도 따라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앗차! 저 주인은 내 옛 주인이지. 현재 주인은 아니야!’하고 정신 차려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의가 넘어갈 뿐, 내가 사단의 밭으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 그대로 있으며, 다만 순간순간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에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옛날 통치를 받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리고 그 통치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했는데, 거기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그리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인 것처럼 여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것처럼 가장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고 살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 웨스트민스터 교수님들이 상담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사막에 태양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사막의 태양처럼 우리에게 따가운 고통을 주는 것이 우리 삶의 현상입니다. 여기에 있는 가시나무는 옛사람입니다. 그 아래에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시나무를 주장합니다.
따가운 태양에 대하여 마음은 짜증을 부립니다. 불평, 원망을 하고, 방해되는 사람을 없애려합니다. 이권 다툼으로 모여 당파를 만들기도 하고, 그 마음의 주장으로 가시나무가 나타납니다.
그 중간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시나무의 상태에서는 절대 선한일을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변화가 와야 하며, 그것을 통과하면 유실수에서 열매를 얻습니다. 유실수 아래에 있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서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마음에까지 흐르는 줄기, 곧 성령의 생명수를 통해 일어납니다. 마음이 태양 같은 뜨거운 환경에 대하여 좋은 열매 맺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곧 신자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시나무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실수로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가시나무와 같은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럴 때에 나는 가시나무가 아니고 유실수라는 사실을 겨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누구와 전화하는 중에 설악산에 놀러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안식년에도 못놀았지, 방학 동안에도 바빴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여보, 아이들 방학이 끝나가는데 차 타고 어디 좀 갔다 옵시다“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곧 개학하는데, 숙제도 해야 하는데 힘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전 같으면 ”여보, 당신이 내 심정을 너무도 모른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성실한 남편이 좀 쉬러 가겠다는데 어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고 말을 걸어 싸움하는 것은 가시나무의 마음입니다. ”아이들도 휘어야 할텐데,“하고 아이들 핑계를 대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우상 앞에 절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곧 죄의 우상에 가서 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안 되지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안 되지 안돼!‘ ”여보, 그럼 애들 공부시켜요!“ 제가 포기하였습니다. 저는 신분상 유실수이기 때문에, 제 마음 속의 원하는 대로의 가시나무 반응을 보이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시체는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은총과 생명이 나를 다스리고 계시기에 늘 감격스러워야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통치처럼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거기 굴복만 하면 은총, 생명, 새생명이 임하기에 이 영역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인 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기에 그대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여기다‘라는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부자 친척이 죽을 때 다른 친척이 없어서 먼 친척뻘되는 여러분 이름으로 800억을 예치해 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통보받고 나서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은 그 구좌에서 한 푼도 꺼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문은 혹시 ”글세, 한번 시험은 해 볼수 있겠지요“라고 한다면 은행에 가서 확인해 볼 것이고, 정말 당신 이름으로 거금이 예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신분이 ”죄에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것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여길지어다‘라고 결론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지‘ 않으면 그것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이지만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늘 확인하십시오.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매장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단번에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 사실이 확인되 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순종하기만 하면, 새생명 안에서 넘치는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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