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18 하나님의 사랑(롬5:6-11)
(롬 5:6, 개정)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개정)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개정)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개정)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10, 개정)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1, 개정)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한국에서 목회를 잘하시는 어떤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롬5:8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목사님의 간증을 읽고 롬5:6-11의 말씀을 두고 저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도 마음에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해 볼 때 좋아하는 구절은 (시 18:29, 개정)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또 (빌 4:13, 개정)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대상 29:12, 개정)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등을 더 좋아합니다.
이처럼 제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분석해 보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왜 그 목사님은 그런 구절을 좋아하고, 나는 이런 구절들을 좋아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내 신앙의 수준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롬5:8을 좋아한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바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19세가의 세계적인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도 롬5:6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불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평생 증거해도 자신은 만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칭의’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도’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성소에 언제든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출입권도 얻었습니다.’ 이것이 ‘화해’입니다. 바로 이 ‘칭의와 화해’는 우리가 연약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경건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였습니다. 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에서도 ‘더욱’라는 말을 두 번 쓰고 있습니다. 9절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하고 했고, 10절에서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완성된 구원을 말합니다. 칭의와 화해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앞으로 더욱 우리의 구원은 더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
롬5:6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라고 한 것은 언제를 가리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을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전혀 행할 길이 없고, 그리고 법적으로 죄인 된 신분에서 빠져나올 능력이 전혀 없을 때를 가리킵니다.
즉 도덕적으로 무능하고, 영적으로도 무능하며, 법적으로도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무능할 때입니다. 유혹과 죄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이길 힘이 없을 때입니다.
바르게 행할 힘도, 환경을 이길 힘도,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전혀 없을 때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10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죄인일 뿐만 아니라 원수인 자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그들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 진리는 지금 못을 박는 것처럼 박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죄의 요소가 남아있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반대편에 서 있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죄인 된 우리의 약한 모습을 다 아시면서도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보장되었습니까?
6-11절의 내용 가운데 어느 한 절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급되지 않은 절이 없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절에서도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라고 하여 죽음이 또 나옵니다. 8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9절에서도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죽으심을 말하고 있고, 10절에서도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라 하고, 11절에서는 즐거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증명서입니다.
특이한 것은 본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을 삼위일체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된 성부의 사랑을 말하고 있고, 6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는 것에서 성자의 사랑이 나옵니다. 8절에서도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사랑이 함께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성자의 사랑만 생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화를 내시는 것처럼 보이고, 성자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셔서 피를 흘리시면서 어버지에 대한 기도하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에는 하나님 성부의 사랑, 성자의 사랑, 성령의 사랑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부의 사랑이 아니면 아들을 내어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부의 사랑이 아니면 성자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서 작으나마 느껴지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홍수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 그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면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그 외아들의 죽으심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가 자고 있을 때, 아니면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처형당해야 한다.’ 생각해 보다면, 부모로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히 사랑하셨지만, 그 외아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기약대로’ 즉 오래전에 예정하신 대로, 정확한 때가 되었을 때 아들이 죽었습니다.
자식이 처형당하기까지 남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예정하셨고, 몇천년을 기다려 때가 되어 이루셨습니다.
어느 광산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갑자기 천정이 무너지고 두 사람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갇힌 공간에는 가스가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가스 마스크를 썼는데, 젊은 사람이 보니 아저씨의 가스 마스크가 찢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는 그 순간에 ‘내가 저것을 쓰고, 저 아저씨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저씨에게는 아내가 있죠, 또 자녀들이 있잖습니까? 저는 결혼하지 않아서 아내도 없고 자녀들도 없습니다. 아저씨가 혼자 죽으시면 가족들의 충격이 너무나 클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스 마스크를 아저씨에게 씌워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이 더러 있고, 선인을 위해 죽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외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신 사랑입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기까지 우리를 깊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확실히 나타났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자신을 전체로 쏟아 부어 주는 사랑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조금만 내가 약해지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착각합니다. 내가 약간의 죄에 빠져도,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버린 것처럼 착각하여 늪에 빠집니다. 우리 자신의 의와 사랑에 하나님의 사랑이 걸려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증명해 주셨는데, 우리는 왜 믿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왜 그 사랑을 믿지 못하여 좌절에 빠집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서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성장의 문제가 있습니다. 많이 성정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습니다. 스펄전의 말대로 적은 믿음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만, 큰 믿음은 천국을 우리의 마음속으로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롬5:5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부 성자의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홍수처럼 쏟아 부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분들은 이것을 많이 느끼고 깨달을 것이고, 성령의 인도를 적게 받는 분들은 그만큼 적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어는 날 노예시작에 갔습니다. 거기에서는 사람을 경매하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 흑인 여인의 눈에는 증오와 멸시를 가지고 주변의 모든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을 본 순간 링컨의 마음은 너무나 끌려서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눈에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얼마나 이용을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노동 착취를 당했는가? 얼마나 끌려 다니면서 고통을 당했던지.’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픈 링컨은 경매에 입찰하였습니다. 최고의 액수를 걸어서 그녀는 링컨에게 낙찰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 날 가지고 뭘 하려 하죠?”라고 물었습니다. “당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하오!” “무슨 대가로 그러시죠?” “아무런 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네, 당신이 하고 싶은 뭐든지 하도록 자유를 주겠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까?” “네, 당신이 말하고 싶은 뭐든지 말할 자유를 주겠습니다.” “그럼제가 갈 수 있는 곳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도록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까?” “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겠습니다. 그러니 자유롭게 마음대로 가십시오.” 그 순간 그 흑인 여자의 증오의 눈, 멸시의 눈, 잔인한 눈길이 바뀌면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띄면서, “그러면 저는 당신이 가는대로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켜 한 여인을 해방시켜 주었을 때, 그 여인이 그 사랑에 감동하여, 그 사랑하는 분을 어디든지 같이 따라가겠다고 했다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고 연약할 때, 불경건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합니까?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신 것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제 무엇을 하기 원하시든지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미스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순간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불경건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인이며 원수일 때 우리를 사랑하시되,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외아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드시고,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시셨고, 그 컵을 뒤집어서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최고의 증거를, 십자가에 그의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왜 다시 의심하십니까? 왜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때로 의심하며 넘어집니까? 왜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착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십하는 자리에 오래 머물러 계시지 말기 바랍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가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듯, 성도들이 철이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지 못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아서, 소망에 확실히 붙들려,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도록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환란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환란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인 줄 알고, 환란 중에도 기뻐하는 믿음의 자리에 계속하여 머무르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강해20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롬6:1-11) (0) | 2024.11.01 |
---|---|
로마서 강해19 대표성의 원리(롬5:12-21) (0) | 2024.11.01 |
로마서 강해17 영광의 소망(롬5:1-5) (0) | 2024.11.01 |
로마서 강해16 아브라함의 믿음(롬4:16-25) (0) | 2024.11.01 |
로마서 강해15 할례와 율법 이전의 칭의(롬4:9-15) (0) | 2024.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