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12 하나님의 의(롬3:19-26)
(롬 3:19, 개정)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20, 개정)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개정)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개정)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개정)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개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개정)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정)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죄와 벌
바울은 19-20절의 말씀에서 죄와 벌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롬 3:19, 개정)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20, 개정)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전에 살펴본 바대로 10-18절에 나오는 많은 인용구의 말씀들은 구약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들을 가리켜 율법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구약성경 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의의 청진기 앞에서 ‘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그래서 롬6:23절에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
죄의 삯으로 인해 죽어야 하고, 멸망당해야 하는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의 심판을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 21절의 말씀부터 이어져 나옵니다.
(롬 3:21, 개정)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개정)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개정)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인정)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개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칭의’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칭의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사형수들은 늘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문을 두드리면서 “누구누구 면회!”하고 부르는 날이 사형 날이기 때문입니다.
‘면회’라고 했을 때, 진짜 ‘면회장’으로 가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해도 사형수가 되면, 죽음 앞에서 불안에 떤다고 합니다. 이때 사형수에게 무기징역으로라도 감형을 시켜준다면 그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감형을 받아 사면까지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의 사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서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의롭다!”라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최종판결로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칭의에 대한 오해가 과거 중세의 1천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말씀이 핵심이기에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칭의의 개념을 주의해서 잘 깨달아야 합니다.
칭의는 사죄와는 다릅니다. 용서란 벌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그대로 있지만 벌주는 것만 생략하는 것이 용서이며 ‘사죄’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벌은 없애주지만 벌을 받아야 할 근거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칭의’는 벌 자체를 없앨 뿐만 아니라 벌을 줄 수 있는 근거를 아예 없애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은 죄인인 것은 분명한데, 판결문으로 “의인”이고 판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진 구원의 확실성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실 모든 근거까지 없애버렸다’는데 있습니다.
칭의는 또한 성화와도 다릅니다.
‘성화’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착하게 살아서 의롭게 되는 것은 성화입니다.
그러나 ‘칭의’는 ‘의롭다고 미리 선언’ 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아직 죄의 뿌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속이나 인격을 볼 때 아직도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부족해, 언약해, 정직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거나, 이단 사이비일 것입니다.
하지만 ‘칭의’는 성화와도 다르기에, 우리의 전인격 속에 죄의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우리의 인격과 선행과는 관계없이 의롭다’고 ‘선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잘못한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향해서 죄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결과 선언은 ‘차별 없이, 또한 값없이’, ‘무죄 판결’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롬2장 11절에서 선포한 대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데,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말씀했습니다(선과 악에 대한 심판).
미스바여러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판결을 돌이킬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죄라고선언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거나, 제시할 존재도 없고,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결문에는 실수나, 오류가 없음으로 절대로 범벅되거나, 변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내가 성화가 되었기에 구원에 이르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칭의‘는 벌을 줄 수 있는 근거까지 없앤다는 점에서 사죄와 다르고, 성화와도 달라서 우리에게 도덕적 선이 있어서 선언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해가 됩니까?)
’칭의‘는 과정이나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은혜이며,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칭의‘는 죄인인 내가 어떤 일을 하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믿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법적인 기록을 아무도 삭제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의롭다고 법적으로 선언하신 것을 아무도 삭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의 ’믿음‘은.. 복음진리를 인식하고, 복음에 동의하며, 예수님께 나 자신을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칭의‘에.. 사죄와 성화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이 방관하는.. 진흙에서 뒹구는 아이를 제가 데리고 와서, 제 아들이라고 선언을 해버리는 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리고 선언한 후에는 몸을 씻깁니다.
하나님도 의인 판결을 내리신 후에, 정결하게 하는 작업을 해나가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칭의‘라는 ’법정적 선언‘에 근거하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칭의‘를 한번 다시 정리해 봅시다.
(1) 법적인 복족이나 인격적인 공로에 근거해서는 칭의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19-20).
(2) ’칭의‘는 1)행위에 의한 의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다(21-22). 2) ’칭의‘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적용된다(22-23). 3) ’칭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전적인 은혜다(24). 이것이 본직이다. 그리고 ’칭의‘의 근거는 오직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다(24-25).
(3) ’칭의‘의 목적은 하나님의 완전 계시이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우심과 죄인에 대한 사랑의 긍휼하심을 계시하는 것입니다(26).
캠벨 몰간이라는 목사님은 ’칭의‘에 대하여 한 광부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해주십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그때 광부는 “제가 돈을 준 적이 없는데 무슨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돈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돈 없이 받는 것은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근거 없이 받는 것은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에게 하나님이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그 광부는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를 타고 갱도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셨죠. 그걸 타고 내려갈 때 돈을 주셨습니까?”라고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광부는 돈을 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돈을 내지 않고 내려가셨죠? 공짜로 내려가시지 않았습니까?”
“네, 저는 공짜로 내려갔지만, 저 대신 주인이 엘리베이터를 만드는데 엄청난 돈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아무것도 지불한 것이 없지만, 천국 엘리베이터에, 당신 마음대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 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복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광부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화목제물
우리는 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그 엄청난 희생이 그 다음에 나오는 ‘화목제물’이란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롬 3:25, 개정)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정)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칭의’ 이후에 나오는 ‘화목제물’에 대한 것에도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고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화가 난 신이 자기에게 와서 재앙을 내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돼지머리 앞에서 절하는 이유는 비행기가 떠나는데 신이 화를 내어 재앙을 내리지 못하도록 달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이든 ‘제사’, 제물로 신의 분노를 달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짓 신의 특징은’ 신이 화를 많이 낸다는 것입니다. 우상들을 보면, 화난 얼굴들이 대부분입니다. 창을 들고, 이빨을 내보이며 금방이라도 재앙을 내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화가 난 신들에게 여러 가지 제물을 인간이 바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화목제물’을 자칫 이교의 의식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화해는 이교의식의 화해와 다릅니다.
(1) 화해가 필요한 것은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교도가 말하듯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고, 별 이유가 없는데도 신경질을 내는 신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거부와 분노의 반응을 보이시는 정의로운 것입니다.
(2) 누가 화목을 시킵니까? 이교의식에서는 항상 인간들이 세밀한 종교의식과 주문과 제물을 바침(식물, 동물, 혹은 인간)으로 화해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용서하시도록 설득하고, 회유하고, 혹은 뇌물을 줄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죄는 우리의 행위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제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3) 화목제물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화목제물은 식물, 동물, 광물이 아닙니다. 인격자이십니다. 성자를 통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화해에는 쌍방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쌍방 가운데 인간은 가해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이며, 영광에 손상을 입으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의 영광에 해를 입혔습니다. 이 쌍방 사이에 화해가 있기 위해서는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여기에 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화목제물’이라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화해에 대한 세 가지 질문 즉,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 누가 화해시킬 것인가? (3) 화목제물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 것입니다.
(1)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 속에서 화해자가 친히 되셨습니다.
(2)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신 사랑으로 화해작업을 하셨습니다.
(3) 하나님 자신이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속하는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조롱을 자아낼 만한 잔인성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배를 자아낼 만한 심오한 사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화해가 이교의 의식과는 정반대인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 앞에서 감격하지 않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망이 입을 벌려 모든 인간이 그 속으로 떨어질 때, 아주 든든하고 굵은 밧줄의 탈 것이 내려와서, 각 사람에게 공짜로 타라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것을 믿고 붙잡아 타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망의 구덩이에서 올라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런 로프를 내리기까지 하나님이 지불하신 것이 있습니다. 실제 하나님이 피해를 보셨고, 영광에 손상을 입으셨으며, 죄로 인하여 진노하셨지만, 친히 아들을 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화목제물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고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피를 흘리게 하신 것은, 죄의 값이 사망이며, 사망이란 생명을 취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친히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해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100%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100% 나타냅니다. 이것이 완성되었기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절대 우리의 의로 되거나, 우리의 주도하에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행하시고, 지불하시고,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불하신 대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마귀를 만족시키셔야 했기 때문에 화목제물을 주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에게는 인간에 대한 권한이 단 1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와 하나님의 거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본문의 화목제물은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도덕법의 포로가 아니라, 도덕법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완전성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법적인 딜레마는 하나님에게 불가한 것입니다(절대로 있을 수 없다).
또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명예와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공격이고, 하나님의 도덕의지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속죄를 통해서 세상에서 잃어버리고, 파괴된 하나님의 명예와 정의를 복원하신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화목제물은 하나님이 자신을 만족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화목제물이 1) 마귀의 요구를 만족시켜 마귀를 정복하기위한 것, 2) 하나님의 법을 만족시키는 것, 3) 하나님의 명예를 만족시키는 것, 4)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것, 5) 세계의 도덕질서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소개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나 하나님을 하나님 외의, 하나님 위의 어떤 외부적인 것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화해의 본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시기 위하여 화목작업을 하셨습니다. 그 화목작업은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로 주시는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목에 칼을 대고 돈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을 것입니다. 통장도 내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 딸의 손가락 하나 내어놓으라고 하면..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내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이 엄청난 희생을 지른 후에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나의 실수나 연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칭의‘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롬3:25절 이하를 보면, (롬 3:25, 개정)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정)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친히 주도적으로 변명할 수 없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동시에 그 근거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내가.. 인생이 다 무너지는 것 같은 실수를 한다고 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셔서, 구원을 완성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나 실수와는 무관하게, 나의 구원이 확실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의가 무너져서 산산조각이 날 때, 가정과 일이 끝장나는 것 같고, 질병으로 인생이 다 무너지고, 죄와 사망의 폭풍에 쓸려가서 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이라도.. 우리에게는, 하나 붙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다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인생이 산산조각 날 때에도,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고,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믿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과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로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는 미비스바라 되길 바랍니다.
나눔/ 예수 때문에
1. 지금 하나님의 의의 청진기로 ‘나’를 진찰하신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2019년을 돌아보고, 2020년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 본문 21절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 그 ‘의’를 갖는 방법은 무엇인가?
-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3.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해 이 구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 24절
-25절
4.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셔서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죄인들을) 의롭다”(26절)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는가?(25절)
5. 26절에 비추어 보아 다음과 같은 말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은 당연히 나를 용서하실 거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니까 부모가 자녀를 용서하듯이 나를 용서하실 거야.
-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 리 없어.“
6. 만일 내가 오늘 만일 내가 오늘 밤 12시에 죽는다면, 하루 24시간을 계산했을 때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죽음 이후에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그에 대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나의 구원의 확신과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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