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리스도만(빌립보서 1:12-26)
🔹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쁨”이라는 단어를 어디서 가장 자주 접합니까? 아마 광고나 SNS, 혹은 누군가의 웃는 얼굴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대부분 환경이 좋을 때, 문제가 없을 때,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고난의 한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몸은 쇠사슬에 매여 있고, 목숨을 보장받을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두 번이나 고백합니다. 기쁨은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서 나오는 기쁨임을 그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복음의 기회로 해석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참된 기쁨의 근원이심을 함께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비밀은 단순한 긍정의 힘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 1 – 고난은 복음의 길을 막지 못한다 (빌립보서 1:12–14)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시작합니다(1:12).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오히려 복음이 더 널리 퍼졌다고 증거합니다. 겉보기에는 고난이고, 실패이며, 정지된 시간 같지만, 바울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결박은 오히려 “모든 시위대 안”에, 곧 로마의 군인들과 황제 가까이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1:13).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난 일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모든 상황 속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감금조차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장시키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의 고난은 믿음의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1:14). 사람들은 보통 고난을 보면 두려워하고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난은 반대였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신자의 고난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분명한 도전을 줍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나 경제적 어려움, 질병과 같은 고난 속에서 우리는 자칫 복음의 문이 닫힌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결코 결박당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2:9에서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동적으로 역사하는 그 은혜를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단지 ‘긍정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자신의 고난을 복음의 진보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개인의 고난, 가정의 어려움, 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 본론 2 – 동기가 어찌하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기뻐한다 (빌립보서 1:15–18)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동기는 모두 순수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1:15)라고 말합니다. 복음 전파자 중에는 바울의 투옥을 기회로 삼아 자기 우월감이나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그러한 동기조차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고 선언합니다.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나 입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복음 중심적 사고의 진수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동기가 결코 온전히 선하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믿는 자들의 행위도 전적 타락의 영향 아래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도구조차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동기가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신다면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사역의 “결과”보다 “동기”에 너무 집착하여 낙심하거나 다른 이들을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불순한 동기조차 당신의 영광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는 섭리적 신앙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역자나 신자 개인에게 참된 복음의 중심성을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자기 성취, 인정, 영향력 확보가 되어선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전해지고 높임을 받으시느냐가 핵심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그림자가 옅어지고, 그리스도의 빛이 더 밝아지는 일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두 번이나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한 점은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복음 중심의 신앙고백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억울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인정받을 때에도,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기뻐할 수 있는 복음 중심의 자세. 이것이 바울의 삶을 이끌었던 힘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사역에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기준입니다.
🔹 본론 3 – 사는 것도 유익, 죽는 것도 유익: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죽음 (빌립보서 1:19–26)
바울은 이제 자신의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의 삶 전체를 요약한 말이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목적을 가장 간결하고 강력하게 드러낸 선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삶과 죽음의 가치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바울에게 삶의 전부가 곧 그리스도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삶의 이유와 목표라는 뜻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임을 가르칩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그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죽음은 실패요 손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며, 더 좋은 것입니다(1:23). 이는 단순히 고난이 끝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리로 가는 것이기에 유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부활 신앙과 천국 소망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음을 소망하면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4). 그는 자신의 유익보다 교회의 유익을 더 생각합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 중심의 지도자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지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더 오래 남기를 바라는 바울의 고백은, 오늘날 목회자와 사역자가 가져야 할 본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v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1:25). 여기서 ‘믿음의 진보’는 단지 지식의 성장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더욱 신뢰하고, 더욱 닮아가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그 일을 위한 도구로 쓰이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고백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청됩니다. 나는 왜 사는가?
만일 내 삶이 그리스도가 아닌 것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복음 앞에서 다시 방향을 정립해야 합니다.
또한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완성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 있는 자의 자유와 담대함입니다.
🔹 결론 – 복음은 고난을 이기게 하고, 기쁨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감옥이라는 현실 속에서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기 때문이며, 자신의 삶과 죽음이 모두 그분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확신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맞이합니다. 몸의 질병, 마음의 외로움, 관계의 아픔, 미래의 불안...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새로운 관점을 배웁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복음의 통로입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시며,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고난조차도 복음의 기회로 삼으며,
기쁨으로 그분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시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이 고백이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 퍼질 때,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내 인생이 고난의 연속처럼 느껴질 때에도,
그 속에서 주님의 손길과 복음의 능력을 보게 하소서.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이유요, 기쁨이요, 영광이 되게 하소서.
오직 그리스도만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그로 인해 기뻐하게 하시고, 기꺼이 그 길을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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