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와 축제와 안식(에스더 9:1-19)
✨ 서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억울한 일을 겪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항변할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하나님, 정말 보고 계십니까? 정의는 살아 있습니까?”
몇 해 전, 한 노신사가 조용히 법정을 떠나는 장면이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30년 전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분이었는데, 뒤늦게 무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지요. 그분이 갚으실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말씀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받던 시대에,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보응하십니다.
하만의 음모 아래 절멸 직전까지 몰렸던 유다 민족은, 오히려 승리와 안식의 날을 맞이합니다.
이 날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날이었습니다.
억울함을 아시고, 침묵 속에서도 일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드러나는 역전의 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에도 반드시 찾아오는
“하나님의 날”, 그 날을 바라보는 믿음을 함께 붙들기를 원합니다.
이제 본문을 따라, 하나님의 보응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 1 – 하나님은 악을 기억하시며 심판하신다
에스더 9장은 이전 장들에서부터 이어진 긴장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하만이라는 한 사람의 교만한 꾀로 인해 유다 민족 전체가 멸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만은 아말렉 사람 아각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과의 오래된 적대감을 이어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빌미 삼아, 유다 민족 전체를 진멸하려는 사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하만의 음모는 단순한 정치적 책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 도전하는 사탄적 시도였습니다.
그는 제비(부르)를 뽑아 유다인들이 죽임을 당할 날짜를 정했고, 왕의 인장을 이용해 전국에 그 조서를 공포합니다.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바사 제국의 곳곳에서 유다인은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만이 제비를 뽑던 날도, 조서가 공포되던 순간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장면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짙게 흐르고 있습니다.
9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이 구절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을 기억하시고, 마침내 그에 대한 보응을 집행하신 순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악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습니다. 악인이 심판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잠들지 않습니다. 반드시 때가 되면 드러납니다.
한 기독교 작가의 실화가 떠오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정치범으로 고문을 당했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는 그 고문관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엔 분노했지만, 하나님의 보응은 단지 ‘징벌’이 아니라 공의로운 회복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치심으로 나를 위로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회복시키심으로 나의 고통을 갚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만은 이미 장대에 매달려 죽었지만, 그의 악한 꾀에 동조한 자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방어권을 얻었고, 그들을 해치려 했던 대적들을 처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유다인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개입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억울함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눈물도, 침묵도, 참아낸 순간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때로 악을 묵인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손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 본론 2 – 하나님의 보응은 ‘공의의 회복’이다
에스더 9장 1절은 이 모든 사건의 전환점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이 말씀은 단순한 전투의 승리를 넘어선 공의의 회복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는 방식은 단순히 악인을 벌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의 보응은 언제나 의인을 세우시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며, 정의의 질서를 바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의 원수를 향해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이 싸운 것은 자신들을 죽이려 한 자들, ‘대적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인에게 자기 생명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고, 왕은 이에 대해 조서를 내려 그 방어를 합법화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유다인들이 단순한 분노의 감정으로 칼을 들었던 것이 아니라, 공의의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9장 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
이 표현은 복수의 광기가 아니라, 억울한 피를 흘렸던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 집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이런 장면을 읽으며 ‘유다인이 너무 잔인한 것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유다인들은 ‘자기를 해하려 한 자들’에게만 행했고, ‘탈취물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 실현이었지 개인적 이익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 크리스천 판사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살인사건을 다룰 때, 가해자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하고자 했지만, 법적으로는 반드시 징역형을 선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용서와 공의는 다르다. 하나님은 둘을 함께 이루실 수 있는 분이지만, 인간 재판은 반드시 공의를 따라야 한다.”
이 고백은 오늘 본문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공의가 세워지고 회복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하만의 죄와 악을 기억하셨고, 그것에 대해 철저히 보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유다인의 자존감과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무너졌던 질서가 회복되고, 대적들의 위협이 사라졌으며, 민족의 정체성이 다시금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응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우리는 종종 ‘악을 악으로 갚고 싶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감정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아야 할 싸움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정의보다 더 완전하고 더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옳게 갚으시고, 회복시키시는 날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역전의 날,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악을 없애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분은 의를 세우시고, 회복을 이루시고, 그분의 공의로운 질서를 새롭게 하십니다.
📖 본론 3 – 보응의 날은 ‘기쁨과 안식의 날’이 된다
에스더 9장은 단지 대적을 물리친 날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응이 완성되는 장면은 심판 이후에 찾아오는 기쁨과 안식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단지 악인을 심판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깊은 위로와 회복의 날을 허락하십니다.
그날이 바로 부림절의 시작이 된 기쁨과 안식의 날입니다.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기록됩니다.
“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또한 18절에는 수산성에 거주하던 유다인들이 하루 더 방어하고, “십오일에 쉬며 이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9절이하는 이 날이 후에 ‘부림절’로 기념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쉬며 잔치를 베풀어 즐겼더라”입니다.
이는 단순한 안도의 순간이 아닙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안식과 감사의 축제였고, 공동체가 함께 누린 은혜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보응’ 하면 칼과 심판, 눈물과 징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응은 그분의 백성이 다시 웃고, 쉬고, 찬양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지 악을 벌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선한 질서를 회복하고, 백성을 위로하며, 새로운 축제를 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사의 큰 그림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보응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공의의 형벌이 그분께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보응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 후에 무덤이 열리고, 부활이 일어나고, 성도에게 영원한 안식과 기쁨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결국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축제를 열게 하십니다.
이 장면을 오늘날 현실의 이야기와도 연결해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억압과 학살의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기념일’을 단지 추모가 아니라 축제와 회복의 날로 만든 사례가 있습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도 처음에는 눈물과 슬픔만 가득한 날이었지만, 이제는 자유와 평화, 시민 공동체 회복을 선포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날을 걸으며 노래 부르고, 꽃을 들고 광장을 걷습니다.
눈물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날이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을 기억함이 곧 정의를 세우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부림절을 기억하고 지킨 이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기억해야 할 은혜’였고,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은 단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역사를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의 삶에도 하나님의 날, 역전의 날이 있습니다.
억울함 속에 눈물로 보낸 날들, 고통 중에 하나님께 매달렸던 날들,
그 모든 날들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고, 마침내 기쁨과 안식의 날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반드시 끝이 기쁨입니다.
그분의 심판은 회복을 향하고,
그분의 공의는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림절과 같은 축제의 날을 소망하며 오늘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은 우리가 억울함을 벗고, 다시 웃게 되고,
하나님 앞에 안식하며 기쁨으로 예배하는 승리의 날, 회복의 날,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 결론 – 복음의 핵심과 삶의 적용 (약 600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더 9장의 “역전의 날”은 단지 과거의 유다 민족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날, 보응의 날, 회복의 날은 임합니다.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로 갚으시며, 위로와 회복으로 채우시는 날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 가장 결정적인 역전의 날은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사탄은 십자가를 패배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날을 구속의 승리, 보응의 완성, 구원의 시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값을 대신 감당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더 이상 복수의 마음이 아닌 은혜와 안식의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역전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은 원한을 푸는 날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 마무리 기도
“공의의 하나님,
악이 득세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당신의 보응을 신뢰하게 하시고,
억울함을 주님 손에 맡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도 언젠가 맞이할 ‘하나님의 날’을 소망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기다리며,
기쁨과 안식의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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