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두 아들 이야기(누가복음 15:11-32)
✍️ 서론: 돌아갈 수 없는 곳, 그러나 돌아가야 할 곳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어린 시절의 고향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관계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하나님과 가까웠던 시절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후회도 하고, 아쉬움도 품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애써 잊으려 하고, 지금 있는 자리를 합리화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고 구원하러 오신 분’(눅 19:10)이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어버린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자를 어떻게 품어주시는지를, 놀라운 은혜로 들려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작은 탕자의 그림자, 그리고 율법적인 큰아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두 아들을 기다리며 품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돌아오라.”
📖 본론 1: 둘째 아들의 떠남 –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자유를 잃다
본문: 누가복음 15:11-16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막내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십시오.”
이 말은 당시 문화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요구였습니다.
재산 분배는 보통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이뤄지는 것이었고, 그 전에는 상속을 요구하는 것이 불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말합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 없이도 살고 싶습니다. 제 몫 주세요.’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단지 나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는 놀랍게도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들은 얼마 안 가서, 모든 재산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납니다.
본문은 짧게 말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눅 15:13)
그 먼 나라는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진 삶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세상은 처음엔 달콤한 자유를 약속합니다.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교회도, 율법도, 아버지도 없어. 진짜 자유야.”
하지만 그 자유는 곧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삶이었습니다.
결국 아들은 모든 것을 잃고, 한 이방인의 집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됩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돼지를 치는 일, 심지어 그 먹이조차 부러워하는 삶…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파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지금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생, 하나님의 형상을 망각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6)
하나님 없는 인생의 끝자락은 항상 이 문장으로 귀결됩니다.
“아무도 주지 않는다.”
세상은 약속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버티다 쓰러지면 버려집니다.
죄는 달콤하지만, 끝은 공허하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끝에서, 한 줄기 소망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아들은 생각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7)
회개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부터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직시하고,
아버지를 기억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길이 시작됩니다.
📖 본론 2: 아버지의 기다림 – 조건 없는 사랑의 본질
본문: 누가복음 15:17-24
인생의 바닥에서, 둘째 아들은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해 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8)
하지만 그의 회개는 아직 완전한 복음적 이해는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9)
이 말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실패했고, 자격이 없다. 다시 아들이 될 순 없어.
하지만 일꾼으로라도 받아달라. 댓가를 치르며 다시 올라갈게.’
이것은 여전히 자신의 공로로 회복해보려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시 일꾼으로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너진 자를 다시 “자녀”로 회복시키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본문은 이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
그 아들이 모든 말과 행동으로 회개를 증명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먼저 달려나가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노인이 달린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수치를 감수하고 달려갑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돌아오는 길에서 사람들의 정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들이 “나는 아들이 아닙니다. 품꾼으로 삼아주세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 말을 끊고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2)
여기에는 회복의 모든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 좋은 옷: 수치가 아닌 존귀함
- 가락지: 가족으로서의 신분 회복
- 신발: 종이 아니라 아들임의 표
이것은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죄의 옷을 벗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히시며,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라 선언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잔치를 엽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4)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다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자를 정죄가 아니라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본문은,
우리가 어떤 실패를 겪었든지,
어떤 먼 나라에 있었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 본론 3: 큰아들의 분노 – 자기의와 율법주의의 위험
본문: 누가복음 15:25-32
탕자가 돌아와 집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집안 구석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입니다.
그는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춤 소리를 듣고, 종에게 묻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자초지종을 들은 큰아들은 기뻐하기는커녕 “노하여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눅 15:28)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자기의(自己義)의 폭발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29)
이 말 속에는 복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자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았고, 늘 옳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순종이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그의 순종은 계산이었고, 교환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섬겼으니,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위험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와 보상만을 바라보는 신앙.
그러기에 큰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0)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이 아들’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동생이라 부르지도 않는 거리감이 묻어납니다.
사실상, 큰아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떠난 자였습니다.
집 안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탕자였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아버지의 태도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1)
아버지는 큰아들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향해 “얘야”라고 부르시며,
그가 그동안 누려온 관계적 특권과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2)
복음은 공로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에 근거한 은혜의 초대입니다.
큰아들이 그것을 이해했다면, 그는 기뻐하며 함께 춤추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명백한 타락 속에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큰아들처럼,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내게 무엇인가 해주셔야 한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복음을 잊고, 은혜를 계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 마음을 좀 보거라. 돌아온 자를 함께 기뻐하자.”
🔚 결론: 아버지께 돌아오라 – 은혜 안에 머무는 삶
누가복음 15장의 마지막 장면은 조금 이상하게 끝납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는 결국 들어갔는지,
예수님은 끝을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또 오늘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결정을 요구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두 아들을 보았습니다.
- 한 사람은 명백히 죄를 짓고 떠났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은혜를 입었습니다.
- 또 한 사람은 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사랑을 모르고 자기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아들을 기다리시고, 달려나가시며, 안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에도, 멀리 떠났을 때에도,
심지어 자격 없다고 느낄 때에도, 여전히 ‘아버지’로 계십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맞이하시는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주신 회복의 길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품으시는 은혜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마음이 멀어진 분이 계십니까?
은밀한 죄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분,
혹은 “나는 그래도 이만큼은 했지”라는 자부심 속에 복음을 잊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돌아오라.”
그분은 우리가 돌아오는 길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품에는 정죄 대신 용납이 있고,
계산 대신 기쁨이 있으며,
일꾼의 자리가 아니라 자녀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아버지께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며,
복음 앞에서 다시 새롭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기도로 마무리
주님, 우리가 멀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품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죄를 주 앞에 토로하게 하시고,
자녀로서의 회복을 누리며,
은혜 안에 살아가는 참된 성도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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