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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설교(매일성경)_새벽 말씀

집요한 사랑, 하늘의 기쁨(누가복음 15:1-10)

by essay2598 2025.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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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사랑, 하늘의 기쁨(누가복음 15:1-10)

 

🕊 설교 서론

여러분은 최근에 무언가를 잃어버려 보신 적 있으신가요?
작은 열쇠 하나, 지갑, 혹은 오래된 물건 하나라도, 막상 사라지면 마음 한 켠이 허전하고 조급해지지요.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지고, 기억을 더듬고, 마지막엔 “제발 제자리에 있어라…”하며 기도 아닌 기도를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제 지인이 작은 금반지를 잃어버렸는데, 별로 귀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돌아가신 어머님이 주신 것이어서 그 의미가 특별했습니다.
결국 그 반지를 찾았을 때 그는 말했습니다.
“마치 마음 한 조각을 다시 되찾은 것 같았어요.”

이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잃는 일’에 쉽게 마음을 쓰고,
‘찾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며, ‘되찾았을 때’ 크나큰 기쁨을 누립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마리 양, 한 드라크마… 세상은 작고 하찮게 여길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포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시 찾기까지, 끝까지 멈추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했는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 본론 1: 잃은 양의 비유 – 한 마리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을 듣고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비판에 대답하시며, 주님은 한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5:4)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양은 중요한 생계 수단이자 정체성의 일부였습니다.
100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었다는 것은 단순한 숫자의 손실이 아닙니다.
그 목자의 마음에는 잃어버린 “한 마리”가 계속 떠오릅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온전한 상태인데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주님의 관심은 항상 ‘잃은 자’에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핵심 구절은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입니다.
이것은 ‘어쩌다 보니 찾았다’는 우연이 아니라, 의지적인 수색, 지속적인 추적,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성도여러분, 혹시 밤길을 걸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등불 하나에 의지해 어두운 산길을 오르는 심정,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불안함.
그 길을 한 마리 양을 위해 기꺼이 가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가시덤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내가 너를 찾았다”고 품에 안아올리시는 분이십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5)

어깨에 메고 온다는 건, 그 양이 지쳐 있다는 것, 스스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모든 수고를 대신 감당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친밀하고, 온유하며, 강력한 사랑입니까?

그리고 주님은 주변 이웃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 15:6)

기쁨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회개의 기쁨, 회복의 기쁨, 돌아온 자를 향한 환대의 기쁨
공동체 전체와 나누길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여기서 “의인 아흔아홉”은 자신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오는 한 사람에게 더 큰 기쁨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아흔아홉 마리 가운데 만족하고 있진 않습니까?
주님의 시선은 늘 한 사람, 지금도 길 잃은 그 한 영혼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그분은 다시 찾기까지 절대 멈추지 않으십니다.

📖 본론 2: 드라크마의 비유 – 작은 것 하나를 위해 온 집을 비추는 하나님의 열정

잃은 양의 비유에 이어, 예수님은 또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번에는 목자가 아닌,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열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5:8)

드라크마는 당시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작은 은전 하나지만, 이 여인에게는 단순한 화폐 이상의 의미였을 수 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는 결혼한 여인이 열 드라크마를 엮어 장신구처럼 지니는 경우도 있었기에,
이것은 신분과 정체성, 관계와 약속의 상징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단 한 개의 동전을 잃어버렸지만,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온 마음을 다해 찾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잃은 한 영혼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 정도쯤 괜찮지 않냐”고 말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 하나가 사라졌을 때, 온 집을 밝히고 온 세상을 비추어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등불을 켠다는 것은 어두움을 밝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고,
집안을 쓸며 찾는다는 것은 정리하고, 수고하고, 집중하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은 한 사람을 회복하시기 위해 상황을 정돈하시고, 말씀의 빛을 비추시며, 성령으로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집 안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경험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평소엔 보이지 않던 먼지, 구석, 낡은 곳들이 그때야 유난히 잘 보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집 안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새롭게 보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도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의 마음 구석구석을 비추시며,
회개의 빛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냅니다.
그 기쁨은 너무나 커서, 이웃들을 불러 함께 나눕니다.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 15:9)

이 작은 은전 하나를 되찾은 일에 왜 이렇게 기뻐하는 걸까요?
그것은 가치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 한 영혼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영혼을 되찾는 기쁨은 하늘나라 전체가 함께 즐거워할 일
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이 말씀은 단순한 묘사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실제로 기쁨의 환호가 울려 퍼진다는 선언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그 한 사람이 돌아오는 장면을 보고 기뻐 찬양하며 경배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또 하나님은 무엇을 찾고 계시는지를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빛을 비추고 계시고,
우리를 통해 찾으시며,
하늘에 기쁨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 본론 3: 바리새인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 – 죄인과 함께하시는 주님의 마음

누가복음 15장은 두 가지 비유—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1-2)

예수님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멸시받던 이들과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죄인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것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입니다.
유대 문화에서 식사는 관계의 친밀함동일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의인’이라 자부했기에,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행동은 거룩함의 파괴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수군거림에 맞서 두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 속에 하나님의 시선을 담아내십니다.

  • 바리새인의 시선은 '왜 저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냐'는 판단의 시선이었지만,
  • 예수님의 시선은 '왜 그들을 외면하느냐'는 긍휼의 시선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누구를 품고 있습니까?
‘잃어버린 자’를 불편해하고, 교회의 분위기를 해친다고 여긴 적은 없습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을 무조건 용납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들을 회개로 이끄시기 위해 가까이 하셨고,
그 회개가 이루어질 때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참된 회개와 회복의 자리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율법의 경계 안이 아니라, 은혜의 식탁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사명은 “깨끗한 사람들끼리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찾지 못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 그들을 위해 등불을 켜고, 어깨에 메고 오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중심 밖’을 향했습니다.
성전 안보다 길거리에서, 예루살렘보다 사마리아에서, 종교 지도자보다 간음한 여인과 세리를 향해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주님의 마음이 바로 그 잃은 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 결론: 멈추지 않는 사랑,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길을 잃고, 상처 입고, 스스로 돌아올 힘조차 없던 우리를
주님께서 찾아오셨고, 어깨에 메셨고, 기쁨으로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찾으심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고, 어두운 이 땅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잃은 자를 되찾은 기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늘의 기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또 다른 ‘잃은 자’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가족 중, 이웃 중, 교회 밖에 있는 누군가…
그 한 사람을 위해 등불을 켜고, 기도하며, 찾기까지 멈추지 않는 주님의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한 사람의 회개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주님의 마음에 합한 우리가 순종으로 걸어갈 때, 교회를 통해 이 땅에 드러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의 집요한 사랑이 우리 안에 다시 불붙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찾는 자’로서 이 세상 속에 하늘의 기쁨을 가져오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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