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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오늘의 QT)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요나 4:1-11)

by essay2598 2026.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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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 4:1-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내 생각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 사람을 용서하십니까?"
"왜 저 사람에게 또 기회를 주십니까?"
"왜 하나님은 저렇게 일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따지지는 않아도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에 가장 크게 불만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선지자 요나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니느웨는 회개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부흥이었습니다.

한 도시 전체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나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노합니다.

사람들은 회개했고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정작 하나님의 종은 화가 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은 니느웨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요나의 마음을 치료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오늘 우리의 마음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 속에 숨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원문을 보면 단순히 화가 난 정도가 아닙니다.

심히 불쾌해했고 크게 분노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선지자라면 회개를 기뻐해야 합니다.

사역자라면 열매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 말은 원래 찬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찬양이 아니라 불평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도망쳤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몰라서 화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니느웨를 미워했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요나는 그들이 망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살리기를 원하셨지만 요나는 심판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닮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학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모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긍휼은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요나의 문제는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좁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은 즉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질문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요나가 자기 마음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문제는 상대방입니까?

정말 문제는 상황입니까?

아니면 내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까?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작은 박넝쿨을 통해 우리의 우선순위를 보여 주십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동쪽 언덕에 초막을 짓고 앉습니다.

아직도 혹시 니느웨에 심판이 내릴지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완고한 마음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박넝쿨을 준비하십니다.

큰 잎이 요나의 머리를 가려 주었습니다.

더위가 사라졌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조금 전까지 죽고 싶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기뻐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자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뜨거운 동풍까지 불어옵니다.

다시 요나는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니느웨 십이만 명이 살았을 때는 화를 냈는데,

박넝쿨 하나 생겼을 때는 크게 기뻐하고,

박넝쿨 하나 사라졌을 때는 죽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관심보다 내 편안함에 더 민감합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내 형편이 중요합니다.

영혼보다 내 기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보다 내가 얻고 잃는 것이 더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 요나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박넝쿨은 사실 요나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심은 것도 아닙니다.

자라게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받은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잃자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당연한 줄 알았던 건강.

당연한 줄 알았던 직장.

당연한 줄 알았던 가정.

당연한 줄 알았던 평안.

사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박넝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리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박넝쿨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박넝쿨을 흔드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가장 기뻐하십니까?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낙심하십니까?

그 대답이 지금 우리의 우선순위를 보여 줍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긍휼로 넓혀 가십니다.

본문의 절정은 마지막 두 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요나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박넝쿨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11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요나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꾸짖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요나야, 너는 박넝쿨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이 수많은 생명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관심은 심판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멸망이 아닙니다.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죄인이 죽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니느웨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고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끼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오늘 구원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내가 포기한 사람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내가 판단하는 사람도 하나님은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보다 좁아서는 안 됩니다.

결론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바라보셨습니다.

요나는 심판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셨습니다.

요나는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혼을 아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또 묻습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것을 우리도 아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을 우리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며 그 긍휼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1. 내 감정과 자존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품게 하소서.
  2.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긍휼을 회복하게 하소서.
  3.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나도 사랑하게 하소서.
  4. 십자가의 긍휼을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본문: 요나 4:1-11

요나서는 참 독특하게 끝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데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붙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리기를 원하시는데 요나는 심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요나를 책망하기보다 질문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욘 4:4)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향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이 옳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을 이루실 때, 내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올 때 마음속에 불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보다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박넝쿨 하나를 통해 요나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요나는 박넝쿨이 생겼을 때 크게 기뻐했고, 시들었을 때는 죽고 싶어했습니다. 니느웨의 수많은 생명보다 자신의 편안함에 더 마음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내 형편에 더 관심이 많고, 잃어버린 영혼보다 내 문제에 더 민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시선을 박넝쿨에서 영혼으로 옮기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의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욘 4:11)

이 말씀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아끼셨고 사랑하셨고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아낀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우리도 하나님이 아끼시는 영혼을 품고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묵상 질문

  1. 지금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박넝쿨'은 무엇입니까?
  2. 나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3.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영혼을 나도 아끼고 있습니까?

오늘의 기도

주님, 요나처럼 좁은 마음에 갇히지 않게 하소서. 내 감정과 생각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품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영혼을 나도 사랑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나타난 긍휼을 기억하며 오늘도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한 줄 말씀

"하나님은 내가 아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아끼신다." (욘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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