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 하였더라
본문: 요나 1:1-10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해서 힘든 때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지만 순종하기 싫어서 힘든 때가 더 많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면서도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정면으로 반항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조용히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기도를 미룹니다.
순종을 뒤로 미룹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적용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지를.
오늘 본문의 요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도망의 길에서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은 도망가는 선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자리로 부르신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니느웨였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의 중심지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니느웨가 이스라엘의 원수였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니느웨가 심판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가장 가기 싫은 곳으로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본토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바로 앞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조롱받을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편안함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묻습니다.
“주님,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신앙의 본질은 내가 원하는 길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 신뢰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은 분명한데 내 감정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마음은 싫습니다.
주님은 섬기라고 하시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 아까워서 못 놓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요나처럼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말씀을 따를 것인가,
내 마음을 따를 것인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편한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복된 길입니다.
2. 불순종은 언제나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3절은 매우 중요한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려갔더니”
욥바로 내려갑니다.
배에 내려갑니다.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영적으로 계속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특징입니다.
죄는 단번에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조금씩 내려가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입니다.
작은 게으름입니다.
작은 불순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요나는 지금 어디까지 내려갔습니까?
결국 하나님 얼굴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창세기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를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예배를 형식으로 만들고,
기도를 습관으로 만들고,
말씀을 정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선지자이지만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육체의 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혼의 잠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각이 없습니다.
기도를 해도 갈급함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찔림이 없습니다.
그 상태가 가장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폭풍이 불고 있는데도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폭풍으로도 자기 백성을 깨우신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폭풍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미워해서 폭풍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요나를 포기하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냥 다시스로 가게 두셨을 것입니다.
순조롭게 도착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사랑하지 않으면 간섭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개입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흔드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깨우십니다.
때로 우리 인생에도 폭풍이 찾아옵니다.
계획이 무너집니다.
관계가 흔들립니다.
사업이 막힙니다.
건강이 무너집니다.
그때 우리는 먼저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그러나 신자는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 일을 통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폭풍은 심판일 수도 있지만,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일 수도 있습니다.
요나는 폭풍 속에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엽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바다를 건너 하나님을 피하려 했습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걱정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으려고 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고백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삶이 분리될 때 찾아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서는 실패한 선지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실패한 선지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추적하셨습니다.
요나는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요나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우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피해 달아났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으로 폭풍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폭풍을 맞으셨습니다.
요나는 자기 죄 때문에 바다에 던져졌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나처럼 도망쳤어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멀어졌어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어도,
주님은 깨우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도망의 길에서 돌아오십시오.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피하지 말고 주님의 얼굴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곳에 회복이 있습니다.
그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곳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복음이 있습니다.
아멘.
기도제목
- 하나님보다 내 생각을 앞세웠던 불순종을 회개하게 하소서.
-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부분을 깨닫고 깨어나게 하소서.
-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 끝까지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 하나님이 맡기신 나의 니느웨를 외면하지 않고 순종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도망치는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요나 1:1-10)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니느웨는 악한 도시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그는 순종의 길 대신 도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순종을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내 감정과 내 계산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가 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배도 있었고, 배삯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조로운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불순종의 길도 쉽게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바람을 보내셨고 폭풍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폭풍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도망가는 종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피하고 있는 순종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말씀하셨지만 계속 미루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용서해야 할 사람, 화해해야 할 관계, 감당해야 할 사명, 내려놓아야 할 욕심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 하지 말고 내 앞으로 나오라."
복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도망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피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얼굴 앞으로 나아갑시다. 도망치는 자리보다 순종의 자리가 더 안전하며,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묵상 질문
- 지금 내가 피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보다 내 생각을 더 앞세우고 있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 최근 내 삶의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기도
주님, 저는 종종 요나처럼 주님의 뜻보다 제 생각을 앞세웁니다. 순종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피하고, 가야 할 길을 알면서도 돌아서곤 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부르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주님 앞에 서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한 문장
하나님은 도망가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폭풍 속에서도 다시 순종의 길로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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