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본문: 고린도전서 11:17-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고, 처음 감사했던 마음을 잊어버리고,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부부가 처음 결혼할 때는 서로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처럼 사랑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의 마음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있는데 마음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나와 있지만 어느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만찬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 매우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모이면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성찬은 지키고 있었지만 성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찬의 참된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 우리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교회 안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파당이 있었습니다. 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감정적인 다툼이 아니라 성찬의 자리에서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애찬과 함께 성찬을 행했습니다. 성도들이 음식을 가져와 함께 나누며 교제한 후에 성찬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부자들이 먼저 와서 자기 음식을 먹어버렸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은 늦게 왔고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부르게 먹고 취하기까지 했는데 어떤 사람은 굶주렸습니다.
성찬의 자리가 사랑의 자리가 아니라 차별의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22절에 보니,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이것은 단순히 예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같은 자리로 불러 모으기 때문입니다.
부자도 죄인입니다.
가난한 자도 죄인입니다.
높은 사람도 죄인입니다.
낮은 사람도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십자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중요해지고,
내 입장이 중요해지고,
내 자리가 중요해지면
공동체는 금방 갈라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형제를 품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오래 참아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다른 사람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있습니까?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으로 다시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가 우리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2. 성찬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지적한 후 성찬의 본래 의미를 다시 설명합니다.
23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바울은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의 일을 설명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셨습니다.
곧 배신당하실 것입니다.
곧 조롱당하실 것입니다.
곧 채찍에 맞으실 것입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떡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위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구약에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피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입니다.
완전한 희생입니다.
영원한 속죄입니다.
성찬은 바로 이것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떡을 볼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몸을 찢으셨다."
잔을 볼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복음을 잊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은혜에 익숙해집니다.
십자가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에게 계속 말합니다.
"너는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너는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다시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성찬은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찬을 과거를 기억하는 예식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26절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과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은 십자가와 재림을 함께 바라보는 예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눈물이 있습니다.
아직도 질병이 있습니다.
아직도 고통이 있습니다.
아직도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아직도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이 모든 것을 끝내실 날이 온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날이 온다."
그래서 성도는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재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이 소망이 우리의 삶을 붙드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성찬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떡을 먹고 잔을 마셨지만 십자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무너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다시 십자가 앞으로 데려갑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마음에도 깊이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복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은혜를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소망을 붙드는 자리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몸을 찢기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게 하소서.
- 교회 안의 모든 분열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회복되게 하소서.
-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회개와 감사가 깊어지게 하소서.
-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본문: 고린도전서 11:17-26
우리는 때때로 신앙의 본질보다 형식에 익숙해질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찬을 행하고 있었지만 성찬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함께 모였지만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같은 식탁에 앉았지만 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모임이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고 책망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은 떡은 나누었지만 십자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성찬의 중심은 떡이 아닙니다. 잔도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고,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나는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십자가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이 사실을 다시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과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기억할 뿐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교만을 내려놓고, 감사로 살아가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 사랑이 오늘 우리의 하루를 붙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묵상 질문
- 나는 신앙의 형식에 익숙해져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 내가 용서하고 품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 오늘 나는 예수님의 희생에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의 기도
주님, 저를 위해 몸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 신앙의 형식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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