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논쟁, 부활 논쟁(누가복음 20:19-40 )
🔹 설교 서론: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우리는 매일같이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속에서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을 품게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세상의 법과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 긴장 속에서
때때로 혼란스럽고 지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대에도 이와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정치적 함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로마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동전을 보여주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는 우리 삶 전체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신자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될 것입니다.
🔹 본론1: 예수님의 지혜,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현실을 해석하시다
(누가복음 20:19-26)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종교 지도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책잡아 로마 총독에게 넘기려는 의도를 갖고
간교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눅 20:22)
이 질문은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 민족에게 있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왕이시라는 믿음을 부정하고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몰아 처벌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을 택하셔도 곤경에 빠지게 되는 함정에 놓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함을 아시고 오히려 한 가지 질문으로 상황을 반전시키십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눅 20:25)
이 말씀은 단순한 중립적 해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한 문장 속에 이중적 메시지를 담으셨습니다.
첫째, 세상의 질서를 인정하되,
둘째, 그 어떤 질서 위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통치 질서 안에서 세금을 바치는 것은 마땅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있지만, 우리 존재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가이사의 질서’ 아래 살아갑니다.
정부, 세금, 사회의 규칙, 직장의 구조 속에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 세상의 틀을 넘어서는 더 높은 기준을 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에 갇히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현실을 해석하시며,
그 시선을 우리에게도 초대하십니다.
눈앞의 얕은 논쟁이 아니라, 영원한 통치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지혜를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며 살고 있는가?
🔹 본론2: 부활을 부정한 사두개인, 그러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누가복음 20:27-38)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만의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당대 유력한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으며, 율법은 믿되 부활이나 천사, 영적인 세계는 부정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현세 중심의 삶을 추구하며,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해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제시한 질문은 당시 유대 관습인 계대결혼법(신명기 25:5-10)을 바탕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모두 순차적으로 한 여인과 결혼하고 죽었을 때,
부활이 있다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부활 자체를 조롱하고 부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현실의 연장이며,
그 현실적 혼란을 예수님께 증명해보라는 의도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의 전제를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눅 20:34-36)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세계는 이 땅의 질서와 전혀 다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생명이며,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눅 20:38)
이 말은 부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언이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깊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땅에서 죽었어도, 하나님 안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과의 언약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소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며 우리는 종종 무너지는 인생의 현실 앞에 낙심합니다.
병으로, 상실로, 실패로, 죽음의 그늘이 우리 곁을 스쳐갈 때,
우리의 시선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단지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현재형의 위로입니다.
죽음의 힘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오늘을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죽음을 넘어선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 본론3: 세상 질서 속 신자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
(누가복음 20:19-40 종합)
예수님은 세금 논쟁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고,
부활 논쟁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은 단지 논리적 승리를 위한 답변이 아니라,
신자의 삶의 중심을 무엇에 두어야 하는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다양한 역할과 책임을 감당합니다.
직장에서는 성실한 직원으로,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로, 사회 속에서는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정부의 정책이나 사회의 흐름 속에서
신앙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부담스럽고 때로는 손해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누구의 형상을 지녔느냐?”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있지만,
우리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수많은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임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단지 정체성의 고백을 넘어서,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분명히 정하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는
세상에서의 책임도 성실히 감당하지만,
그보다 앞서,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때로 불편함과 희생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 밖’으로 부르시지 않으시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로마의 질서 속에서 태어나시고,
세리의 세금 징수 속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며,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묻어나는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태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 시간을 하나님의 것답게 사용하고 있는가?
– 나의 말과 태도,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에 합당한가?
– 경제적 선택과 소비는 하나님의 백성다운가?
이 모든 질문 앞에서,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것’을 회복하려는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늘 우리를 가이사의 방식으로 끌고 가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 결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이사의 동전을 손에 쥐고 이 땅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에 새기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논쟁 한복판에서도
세상의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백성의 정체성을 선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것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어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능력으로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것임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기도합시다.
“주님, 나의 시간도, 물질도, 관계도, 생각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향기를 품고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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