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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설교(매일성경)_새벽 말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누가복음 19:1-10)

by essay2598 202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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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누가복음 19:1-10)

 

✍️ 서론

우리는 ‘회개’라는 단어를 자주 듣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단지 눈물 몇 방울로 끝나는 감정적인 반응이라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생각의 변화, 마음의 돌이킴을 넘어서 삶의 방향이 바뀌는 전환입니다. 오늘 본문 속 삭개오의 이야기는 그 진실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눅 18:25-26). 그리고 곧 이어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의 본문, 부자였던 삭개오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중심에는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회개란 우리의 노력 이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의 결과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초청 앞에 돌이키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본론 1 –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오셨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사는 세리장이었고, 그는 부자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동족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었고, 종종 그 과정에서 착취와 부정을 일삼았습니다. 삭개오는 단순한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이었습니다. 즉,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회적으로는 죄인, 영적으로는 멀어진 자였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삭개오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도권은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나무 아래 이르러 머물러 서시고, 삭개오를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누군지도 모르실 수 있었고, 그저 지나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이름으로 부르셨고, 단지 마주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교제와 관계의 회복, 곧 구원의 초청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은 복음의 본질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예수님이 그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삭개오가 스스로 의로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 말씀은 삭개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항상 먼저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결단이나 열심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바로 그 주권적 부르심과 은혜의 실제적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초청하셨고, 말씀을 통해 찾아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진리를 기억할 때, 우리는 회개조차도 자랑할 수 없으며,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삭개오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 본론 2 – 회개는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곧바로 한 가지 놀라운 결단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예수님은 아직 삭개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삶의 변화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란 단지 죄를 고백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 곧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동안 쌓아왔던 잘못된 재물과 삶의 방식에서 완전히 방향을 바꿉니다. 그는 말로만 회개하지 않고, 행동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증명합니다.

그의 고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1.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 이것은 구약율법에서 요구한 구제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것입니다.
    •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가진 것의 주인이 자신이 아님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2.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 출애굽기 22:1에 따르면,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았을 경우 4배로 배상해야 했습니다.
    • 삭개오는 율법을 철저히 적용하여 회복의 책임을 자발적으로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 이것은 형식적인 보상이나 억지스러운 회복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회개의 실천입니다.
  3. 이 모든 변화는 ‘주님 앞에서’ 선포되었다는 점
    • 삭개오의 이 고백은 군중 앞에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드러납니다.
    • 그는 사람의 눈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진정성을 고백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예수님의 반응에서도 확인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구원은 단지 영적인 선언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변화, 즉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삶의 전환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칭의와 성화의 분리되지 않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삶의 변화로 증명되는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을 바꾸고, 참된 회개는 반드시 행동을 낳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에도 이러한 회개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말로만 고백하고, 주일에만 거룩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 사용, 관계 회복, 정직한 삶,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변화된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 변화가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회개하는 마음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방향성 있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죄와 탐욕을 정직하게 인정했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며 삶으로 응답했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주님 앞에서, 삶의 자리에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본론 3 – 예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신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단지 한 사람의 감동적인 회심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의 마지막에 분명히 선언하신 말씀은 이 이야기의 의미를 오늘 우리 삶에까지 확장시켜 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구절 중 하나입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그리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 잃어버린 자의 대표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멸시받고, 종교적으로는 소외되고,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았던 그가, 예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동일한 사명을 따라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하나님을 떠난 이들, 신앙은 있지만 형식만 남아버린 자들, 교회 안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방황하는 이들… 예수님은 지금도 그들을 찾아가고 계십니다.

중요한 점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해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지만,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 그 은혜는 구체적인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삭개오처럼 어떤 방식이든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 주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직접 육신으로 걸어 다니시는 대신, 그분의 몸 된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통해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끄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의 방향’입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는 이것을 ‘소명(voca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다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엡 4:1 참조).
그 사명은 단지 교회 안에서의 봉사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가정 속에서, 직장 속에서, 병상에 있는 자들 가운데서, 방황하는 청년들 가운데서 삭개오처럼 외롭고, 숨어 있고, 죄 가운데 눌린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오늘도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향해 있고, 그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혹시 우리도 그런 자리에 있다면, 오늘이 바로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혹은 우리 주변에 그런 이들이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 결론

삭개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구원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기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분이 오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이름을 아시며, 우리 삶 가운데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삭개오는 그 부르심 앞에 기꺼이 응답했고, 자신의 삶을 돌이키며 회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는 단지 한 순간의 변화가 아니라, 그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는 진정한 전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도 그 동일한 초청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 관계를 회복하는 결단, 이웃을 섬기는 실천이 우리 안에 열매 맺기를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삭개오의 회개를 듣는 자로 머물 것이 아니라, 그 회개를 본받는 자, 그리고 그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직도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 같은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 기도 제안

“주님, 저를 먼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삶 속에서 회개의 열매가 맺어지게 하시고,
저 또한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는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게 하소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주님의 음성이,
저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가운데 울려 퍼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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