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설교(매일성경)_새벽 말씀

잔치와 수치(에스더 1:1-22)

essay2598 2025. 5. 11. 09:37
728x90
반응형
SMALL

잔치와 수치(에스더 1:1-22)

 

🟦 서론

우리는 살면서 ‘성공’과 ‘영광’이라는 단어에 자주 노출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 더 큰 명예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뉴스에서는 재벌의 사치스러운 파티, 정치인의 권력 과시, 유명인의 화려한 삶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 모든 것이 참된 가치와 의미를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 영광이 얼마나 덧없고 잠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더 1장은 세상의 영광이 얼마나 화려하고 동시에 얼마나 헛된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는 자기 나라의 위엄을 뽐내기 위해 180일간의 잔치를 열고, 그 끝에는 왕후 와스디를 사람들 앞에 세워 왕의 권세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영광의 정점에서 벌어진 작은 ‘거절’ 사건은 그의 권위를 흔들고, 결국 잔치는 수치로 끝나게 됩니다.

이 본문은 단지 역사 속 한 왕의 실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세상의 영광을 넘어 참된 영광을 준비해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서곡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장을 통해, ‘보이는 영광’과 ‘보이지 않는 섭리’ 사이에서 무엇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 본론 1 – 아하수에로의 잔치: 인간의 영광이 보여주는 덧없음

에스더서의 첫 장은 아주 이례적인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에 1:1)라고 시작되며,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도, 율법도, 이스라엘도 아닌 ‘페르시아의 영광’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인도에서부터 구스에 이르기까지 127지방을 통치하는 강력한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그는 180일 동안 귀족들과 지방 관원들에게 자신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며, 잔치라는 형식을 통해 세상의 영광을 드러냅니다(1:4). 이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7일간 별도의 연회를 베풀며, 자신의 너그러움과 위엄을 온 나라에 각인시키고자 합니다(1:5).

이 잔치는 단순한 파티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선전이자,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대외적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이벤트였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왕의 능력과 신격화된 지위는 외적 화려함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금으로 장식된 잔, 흰색과 자색의 휘장, 대리석 기둥, 귀한 포도주 –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1:6-7). 그러나 이 모든 화려함은 본질적으로 허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권세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그 중심에는 결코 영원하지 않은 욕망과 교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잔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잔치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인간의 자랑과 과시, 자기 중심적 명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높아지려 했던 타락의 반복이요, 바벨탑을 쌓으며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던 인간 교만의 전형입니다(창 11:4).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자기 영광을 추구할 때, 그것은 결국 우상숭배와 자기 파괴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아하수에로의 잔치는 바로 그러한 ‘헛된 영광의 연회’였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연회는 질서와 형식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본질은 자기를 높이려는 시도였습니다. 마치 사탄이 예수께 “만일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한 것처럼(눅 4:6-7), 세상의 영광은 겉으로는 찬란해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을 신처럼 만들려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지금도 ‘아하수에로의 잔치’를 계속 벌이고 있습니다. 외적인 성공, 물질의 풍요, 사회적 지위와 같은 것들을 통해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바람과 같아서, 순간 번쩍이지만 곧 사라지고 맙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라는 말씀은 이 본문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 없는 영광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영광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영원한 가치는 없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바라보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아하수에로의 잔치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 본론 2 – 와스디의 폐위: 인간 권세의 한계와 실패

아하수에로의 잔치는 그 자체로도 인간 영광의 허상을 드러내지만, 그 절정을 무너뜨리는 사건은 왕후 와스디의 ‘거절’입니다. 본문 1장 10절 이하에 따르면, 왕이 술에 취해 있을 때, 왕후 와스디를 사람들 앞에 불러 그녀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초청이 아닌, 여성을 수단화하고 자신의 권세를 돋보이게 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와스디는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성경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당시 문화와 왕의 요구를 고려할 때, 그녀의 자존감과 도덕적 판단이 거절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사건은 아하수에로 왕의 권세가 얼마나 연약하고 제한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전 세계를 통치하는 제국의 왕이 자신의 아내 하나조차 뜻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그것은 권세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왕은 이에 격분합니다(1:12).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사적인 갈등이 곧바로 ‘국가적 문제’로 비화된다는 점입니다. 왕은 각 지방 고관들을 소집해 정치적 조언을 구하고, 결국 법령을 만들어 와스디를 폐위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왕권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인간 권세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지만, 그 실상은 사소한 일에도 무너지는 존재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권세나 제도, 정치체제를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허락 아래 존재하며, 하나님은 때로 인간 권세의 한계를 통해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로마서 13장 1절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하며, 권세의 궁극적 출처가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아하수에로는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믿었지만, 작은 불순종 하나로 체면이 깎이고, 결국 위기감을 느끼며 제도를 강화하려는 불안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된 전환점입니다. 와스디의 폐위는 이후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길을 여는 사건입니다. 인간 권세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세상 권세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눈앞의 일만 보지만,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 전체를 통치하십니다. 인간의 실수, 갈등, 심지어 불순종까지도 주님의 도구가 되어 구원의 길을 준비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정치인, 권력자, 부유한 자들의 결정을 보며 세상이 움직인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진정한 통치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인간 권세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우리가 너무 사람의 말, 제도, 구조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인간의 권세는 제한적이며,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와스디의 폐위라는 ‘실패의 사건’은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완전합니다.

 

🟦 본론 3 –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 구속사의 예비된 전환점

에스더서 1장은 성경 전체에서 보기 드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에스더서 전체가 그렇습니다. 기도, 율법, 제사 등 신앙적 요소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숨겨진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하수에로의 잔치, 와스디의 거절, 왕의 분노, 고관들의 조언, 법령의 반포 –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에스더가 왕후로 세워지기 위한 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 위기에 처할 때 그들을 구원할 여인의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한 놀라운 섭리의 퍼즐을 맞추고 계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 심지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가신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사건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과 기적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은 깊은 역사로 이어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왕후 와스디가 폐위되면서 끝이 납니다. 왕은 자신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명령을 내렸지만, 사실 그 명령은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궁으로 이끄시기 위한 섭리의 조치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위에 계시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십니다(롬 8:28).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권력자의 실수를 통해서도 구원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적’보다도 더 깊은 하나님의 손길인 ‘섭리’를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에스더서 1장은 역사적으로 보면 그저 한 왕의 잔치와 한 여인의 폐위 사건일 뿐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유다 민족을 보존하고, 메시아의 혈통을 지켜내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권세와 선택, 심지어 실수와 불순종마저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지는 구원의 길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며, 우리 신앙의 깊은 위로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응답 없는 기도, 변화 없는 현실, 실망스러운 사람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언젠가 그분의 뜻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적 적용으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에스더의 자리는 지금 준비되고 있습니다.”

 

🟦 결론 – 하나님의 영광을 따르는 삶의 결단 (약 600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에스더서 1장을 통해 세상의 영광이 얼마나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았습니다. 아하수에로의 잔치는 눈부셨지만, 그 안에는 교만과 불안,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섭리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 권력의 흔들림, 예기치 못한 사건들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절대주권자이십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람의 박수와 인정, 소유와 성취로 채워지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나타났고, 그분은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섬김과 희생, 순종과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영광을 따르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에스더의 자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감춰진 섭리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로 부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영광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참된 영광을 향한 삶입니다.


🙏 기도로 마무리:

“주님, 세상의 화려함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하수에로의 잔치가 아닌, 주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길을 믿고 순종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