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누가복음 20:9–15)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누가복음 20:9–15)
✍️ [서론] –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지 못해 관계가 틀어진 기억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사이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내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 우리는 포기하거나, 단절하거나, 때론 분노하며 끝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한 비유 속에는 인간의 인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맡긴 주인입니다. 그는 수확할 때가 되어 소출을 받으려 종을 보내지만, 종은 맞고, 능욕당하고, 내쫓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다시 종을 보내고, 또 보내고, 마지막에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을 보냅니다.
사람 같았으면 벌써 끝냈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끝까지 참으며,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마나 참으셨는지, 그 인내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함께 묵상하며,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다시 서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 [본론1] – 반복된 인내: 종을 거듭 보내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20:10–12 중심)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종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던 역사적 사건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 내내 백성이 돌이키기를 원하셨고, 그때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첫 번째 종을 몹시 때리고, 두 번째 종은 능욕하고 거저 보내고,
세 번째 종은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이 장면은 그저 예화적인 과장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종들이 당했던 현실입니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져졌고(렘 38:6), 이사야는 톱으로 켜임을 당한 전승이 있으며(히 11:37 참조),
스가랴는 성전 안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대하 24:21).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모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농부들의 반응을 아셨고, 선지자들이 고통당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또 보내셨습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참으시며,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이 하나님의 반복된 인내는 단순한 느긋함이나 무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절한 사랑에서 비롯된 기다림입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까 하여, 또 다른 종을 보내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수없이 거절하고, 외면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 앞에 불순종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말씀을 보내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내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 [본론2] – 마지막 희망: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누가복음 20:13)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떻게 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를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결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종을 거듭 거절한 농부들, 그들의 악행은 도를 넘었고, 이제 주인은 심판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주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 한 마디에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깊은 인내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 아들은 단순히 또 다른 종이 아닙니다.
신분이 다릅니다. 관계가 다릅니다. 본질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세례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눅 3:22)
이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마지막 수단, 마지막 희망, 마지막 메시지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가 절정에 이른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보낼 종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것과 같은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가 단지 “참고 또 참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아들을 통해 그 길을 여시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 사랑의 확증, 하나님 인내의 절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누구길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을까요?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도, **“혹 그를 존대하리라”**는 마음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 [본론3] –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vs 거절하는 인간
(누가복음 20:14–15)
주인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이에 그를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눅 20:14–15)
이 장면은 충격적입니다.
농부들은 아들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이는 상속자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가 단순한 일꾼이 아니라
포도원의 주인과 본질적으로 연결된 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포도원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주인의 권위 아래 있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명령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을 죽이면 모든 것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싫어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며,
결국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
그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들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들이 거절당하고 죽임당했지만,
그 죽음이 곧 생명의 문이 되었고, 부활의 능력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듣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겨냥한 경고였습니다.
그들이 아들을 거절하고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려주실 때,
우리는 그 음성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혹시 우리도 그 음성을 무시하거나, 거절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자기 것처럼 살고자 하는 농부들은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다.”
오늘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 [결론] – 인내의 끝,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인내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종을 보내시고, 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인간의 인내와 다릅니다.
우리는 참다가 그만두고, 몇 번 기회를 주다가 마음을 닫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끝까지 손을 내미십니다.
그 손의 끝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 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무한하지만,
그 인내의 끝은 아들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아들을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소망을 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절했어도,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다. 그를 존대하라.”
그 아들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안에 용서가 있고, 그분 안에 회복이 있고,
그분 안에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사랑 앞에 응답합시다.
하나님의 인내를 헛되이 하지 말고,
그 아들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나아갑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참으신 당신의 사랑 앞에
저희가 다시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거절하지 않고,
온 마음 다해 주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