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24 율법이 죄냐?(롬7장7-13)

essay2598 2024. 11. 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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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24 율법이 죄냐?(77-13)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7: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찰나적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의하고 있는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저를 위한 여려분의 기도가 작용을 했으리라고 믿고 감사들 드립니다.

우리를 이렇게 순간순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되 율법과의 관계 면에서도 보장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율법이 죄냐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율법이 죄냐 하는 질문이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가지 우리가 배운 바를 살펴보면 율법이 절대로 사람을 의롭다는 칭의선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7:1-6절에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어 지금부터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5절에 보면 율법을 통한 죄의 정욕이 우리의 지체 속에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만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일어난 죄의 정욕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오고 난 다음에 바로 따라나온 것이 그러면 율법이 죄냐 하는 질문입니다.

 

죄를 지적하는 율법

율법이 죄냐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율법은 죄가 아니고 율법은 오히려 거룩한 것이다 하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거치는 과정이 있습니다. 7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첫 번째 율법의 기능을 말합니다.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죄를 모르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하지 않고도 죄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양심이라는 법을 주셨는데 이것이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이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라고 선명하게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을 할 때에 내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라는 말을 쓴 것은 그것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말하면서 저기 저 먼 은하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실제로 겪어 본 일,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을 들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외형적인 기준으로 흠이 없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 동남부 지방의 작은 도시 사람으로 예루살렘 대학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하버드 법대에 유학을 한 것입니다. 그 대학의 유명한 교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유학을 하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현재 히브리 대학에서 유학을 하는 학생들이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하면, 그 대학의 교수들이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거의다 욀 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성경 각 권의 글자가 몇 자라는 것까지도 다 세고 있습니다. 그런 교수밑에서 바울은 율법학을 공부한 것입니다. 학생들 중에서 그는 특대생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1장에 보면 그는 유대인 전통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많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유대의 율법은 전부 규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하라고 하는 것이 248가지이고,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가지, 도합 613가지 규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그 규정들이 많은 세부사항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 누가 물건을 가지고 와서 저에게 전달을 하려고 한다면, 안식일에는 노동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 물건을 직접 받을 수 없고 손을 울 밖으로 내 놓지 않은 상태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건을 손으로 옮기는 것도 안식일 금지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몸으로 옮겨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율법을 지키는 데에 조금도 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샴마이라고 하는 학자는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지 대속죄일에 금식을 하는데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도 금식을 시키고 심지어는 자기의 젖먹이 손자까지도 금식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천막을 치고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초막절 날 자기 딸이 산고를 하느라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샴마이라고 하는 학자는 그 딸 위에다가 초막을 짓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그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킨 사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외부적인 기준으로 말하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 사도가 십계명 중에 어느 계명에서 부딪혔는지 알아야 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에 부딪힌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다른 것은 다 지켰는데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 즉 탐심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은 내부적인 계명인 것입니다. 대개 도덕적으로 바로 사는 사람들은 보통 계명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보면서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99%는 다 엉터리라고 통탄을 합니다. 그 엄터리 99%속에 자기는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소위 잘 믿는다는 사람 중에 죄감이 약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속에 죄 짓는 사람들이에 대한 분노가 끊어서 온몸으로 분노를 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죄에 대해서는 치를 떨만서도 자신의 죄는 느끼지 못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바울이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에 부딪힌 것입니다.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 이렇게 들어가 보면 이 계명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자극하는 율법

8-10절에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죄를 주체로 내세우는 것은 죄가 얼마나 간사하고 강력하고 능력있는 존재인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가 계명을 통해서 기회를 잡아가지고는 온갖 탐심을 자기 속에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죄를 드러내는 기능뿐 아니라, 이렇게 죄를 자극하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성교육이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가지고 온 그림과 사진과 시청각 도구들이 학생들의 성충동을 자극시키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성교육을 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자세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호기심을 자극해서 오히려 나쁜 쪽으로 가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도록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히틀러의 부하 하이히만을 끝까지 찾아다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발견을 했는데, 그 때 그는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착하고 선량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6백만을 살해한 아히히만도 표면적으로 착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에는 표면적인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한 대로 사람을 보면 인간 속에는 지독하게 악한 것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는 무서운 죄의 뿌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올 때면 자극되어 온갖 탐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말라고 하는 것은 우리 속에 하고 싶게 만드는 마음을 더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지하지도 못했던 무서운 일까지도 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없던 것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정물 통을 가만히 두면 표면은 맑아 보입니다. 그러나 막대기를 가지고 휘저으면 밑에 가라앉은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한 막대기가 율법인 것입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먼지가 자욱한 방에서 어떤 사람이 빗자루를 가지고 방을 쓸어서 먼지를 일으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때 그 빗자루가 곧 율법인 것입니다. 사람 속에는 원래 먼지가 있고 죄가 있는 것인데 율법을 갖다 대면 확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자극하는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인 것입니다.

 

나는 죽고 죄는 살아

8절 하반절에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죄가 죽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죽어 있다고 말할 정도라는 것입니까? 이 말은 율법이 오면 죄가 죄인을 압도하지만,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잠들어 있어서 깬 상태에서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급 승용차는 엔진의 힘이 강합니다. 그런데 엔진의 힘이 강할수록 차가 달릴 때에 엔진의 강한 힘을 못 느낄 정도로 부드럽게 달립니다. 엔진의 힘이 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고 가는 사람이 못 느끼는 것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나 못 느낀 것이고 죄가 죄로 활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오고 나서는 죄를 죄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부터 10절을 보면,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계명(율법)과의 관계에서 자기나 죄가 죽었다가 살았다, 혹은 살았다가 죽었다는 말을 합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내가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생의 삶 면에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잘 훈련받은 열정적인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은 율법과 관계에서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니다(3:6). 율법의 전문가로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울볍이 오기 전에는 이렇게 자기는 살고 죄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죽었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죄는 죄대로 있으나 자신이 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계명이 이르렀을 때에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계명이 이르자 그때까지 살아 있던 자기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계명이 이르고 보니 자신이 성취한 모든 종교적인 업적이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자존심, 교만 들이 여지없이 꺾이고 초토화 되었습니다. 계명이 이르렀을 때 바울은 비로소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탐내지 말라는 구체적인 계명이 자신이 부딪히고 보니, 하나님의 완벽한 법의 위엄과 거룩 앞에 자신은 깨어진 존재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3:7-8).

 

바울이 여기서 계명이 이르렀을 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 본문의 죽음은 율법이 도구가 되어 죽은 것을 말하지만, 6장에서 나타난 죄에 대한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도구가 되어 죽은 것을 말합니다. (2) 본문에서 계명이 이르러 바울이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속에 들어 있던 부패한 죄가 공개화 되고 더둑 악랄하게 되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계명 없을 때 죽어 있던 죄가 오히려 더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명이 이룬 결과는 10절 말씀대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는 것입니다. 시편119:1-2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이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 산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이 내 속에서는사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율법은 율법에 약속된 생명을 산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율법의 의를 완벽하게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인간이 있다면 그는 율법에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타락한 죄인인 인간에게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생명으로 이르게 할 율법이 죄인인 인간에게는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11절에서 더 심하게 이 점을 표현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여기 속였다는 것은 생명을 줄줄로 알았는데 도리어 사망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속에서 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죄가 죽으면 내가 살고, 내가 죽으면 죄가 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죄가 계명을 이용해서 를 속이고 죽인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죽은 것을 고백했는데,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죄를 깨달음입니다. 죄책감과 죄의 힘에 대한 인식은 죄의 본질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복음수용의 첫걸음입니다. 복음이 죄로부터 구출해 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부패와 참혹 속에 갇힌 나 자신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체로 선한 율법이 사망?

바울은 자기는 선한 일을 했다고 잔뜩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율법이 오니까 자기는 죽고 죄만 살았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죄가 살았다는 것은 자기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죄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율법은 본래 생명을 주게 하는 것인데 사망을 주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 12절에서 다시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했습니다. 율법 자체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교훈입니다. 특별히 시편119:7-11에 기록된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을 때에 율법에 대해서 본문 12-13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본래 내가 암환자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컴퓨터를 갖다 대서 그것이 밝혀졌다고 해서 컴퓨터가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컴퓨터가 와서 개속에 있는 죄를 자극해서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컴퓨터의 잘못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의 잘못인 것입니다. 자기가 살인을 하고 나서 형법이 자신에게 사형한다고 해서 형벌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내 속에 있는 죄인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선한 것이고 의로운 것이지만 왜 율법이 죄를 자극합니까? 율법과 나와 죄 사이에 삼각형을 그리고 그 갈등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죄와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죄가 이깁니다. 죄를 놓고 율법과 내가 싸워도 율법이 이기고 내가 집니다. 이 말은 율법만 가지고는 내가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아이를 교육할 때에도 옳고 그름만 보여주고 죄와 율법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르쳐 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교육받는 아이를 바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를 돕는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의 포인트는 내가 율법을 사이에 두고 죄와 싸우면 분명이 죄에 지게 되어 있지만, 나를 강하게 하시고 이 죄를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처리하시고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내랴고 했을 때에 대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속에 힘이 들어오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으로 인해 구원받겠다는 삶을 살지 마시고, 율법은 그대로 두시되 믿음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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