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7 영광의 소망(롬5:1-5)

essay2598 2024. 11. 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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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17 영광의 소망(5:1-5)

 

(5:1, 개정)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개정)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3, 개정)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개정)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5, 개정)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는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깡통을 찬 거지처럼 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발견하도록 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늘 공격하는 부분이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믿습니까?). 그러나 사탄은 그 믿음이 생활로 유지된다고 믿게 만듭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내일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다는 불안의식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구원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전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신실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하는 것입니다(36:5; 115; 3:23; 딤후2:13; 10:23). 따라서 우리는 사단의 공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구원의 투구를 항상 쓰고 있어야 합니다.(6:17; 살전5:8).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입니다(5:1). 둘째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것입니다”(5:2).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는(5:2)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신과의 화평과 화목의 관계를 유지함으로 복을 받고, 저주와 진노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고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신의 진노를 달래서 액땜을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는 자들은 전부 사탄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8:44; 1:18; 8:7; 2:1). 그들은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종교에서는 무시무시한 신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일생토록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억을 벌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1억을 얻었을 때, 추구한 것을 얻었기에 만족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2, 5, 10억을 얻기 위해 다시 몸부림을 치지만, 그것을 얻어도 절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이것이 죄로부터 파생된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 탐욕은 인간에게 공허함을 가져다줍니다.

돈뿐만 아니라, 권력,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채울 수 없는 항아리에 물을 채워 넣기 위해 열심을 내면서 달려가 보지만, 그 끝은 언제나 공허함 뿐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남편 다섯이 있었고, 여섯 번째 남편을 가진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빈 항아리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그 빈 항아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 여인의 텅 빈 가슴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여섯 번째 남편이 있어도 만족이 없는 공허한 삶입니다. 그러한 삶이 예수님을 만나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로 채워지게 되었고, 그 여인의 삶에 새로운 소망이 즐거움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물동이를 던지고 마을로 가서 생수이신 예수님을 사마리아에 전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까지는 마음에 안식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라고 선포합니다.

사도바울의 이 말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우리로 얻게 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라 말합니다. 이 화평은 성도가 믿음을 통해서 이미 가지고 있는 화평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화평은 우리의 느낌에 의해서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평화는 주관적인 화평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것 같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라지는 조건적인 화평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감정, 기분, 행위,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이며, 하나님이 주신 화평은 절대 취소되는 법이 없는 화평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첫 번째 축복입니다.

 

은혜에 들어가 서 있음

 

이런 평화가 언급된 후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5: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들어감이라는 말은 별 의미 없는 번역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원문에서는 아주 중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성소,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성전 바깥 뜰까지입니다. 여인들은 그보다 조금 더 들어갔고, 보통 사람들이 좀 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반 제사장들은 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성소 다음에 있는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일 년에 한 번밖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제물 둘을 잡았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죄를 위한 제물이고, 또 하나의 제물은 백성들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 앞에 향을 피우고, 그 엄숙한 순간에 지성소의 휘장을 제치고, 지성소로 들어가서 온 방에 향을 가득하게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제물의 피를 언약궤 위 그룹들 사이에 붓습니다.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몸에는 종이 달려 있었습니다(28:35).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봉사할 때 종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 죽은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너무나도 까다롭습니다.

만일 하나라도 잘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인간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정확하게 행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온 우주의 창조주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를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청와대 경비실, 직원, 비서실 모든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저도 지난여름에 아무 생각 없이 청와대를 구경해야겠다고 갔었는데 미리 사전에 신청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차를 차고 주위만 한 바퀴 돌다가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목숨이 달려있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열렸습니다. 우리는 그 길이 열렸다는 것을 믿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지성소를 가렸던 휘장이 찢어졌고, 우리 같은 이방인들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4:16; 10:19-22/ 27:5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는 데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프리패스 출입권을 얻은 것이 우리가 받은 두 번째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신자의 영광과 소망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말씀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지만, 이 영광도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너무나 막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막연한 것조차도 성도는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정말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영광이고,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영원히 계속될 그 영광이 시작되면, 우리 몸의 아픔은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질병, 원한, 약함이 완벽히 치료될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하고 완벽 나라,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이 영광의 소망을 믿음으로 붙잡기 시작하면, 어떠한 환경과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8:17-18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17, 개정)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8:18, 개정)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믿음으로 이 소망을 붙잡았습니다. 비록 많은 핍박과 조롱과 수치와 아픔을 겪었고, 사자의 밥이 되고, 나무에 매달려 화형을 당하는 수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이 소망 때문에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환란과 고통 속에서 영광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놀라운 사실은 환란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번역해 보면, 환란 때문에 즐거워한다란 말입니다. 이유는 환란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환란이 아무 유익도 없이 잔인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환란이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어린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칠 때 수영 선생님이 판으로 아이를 때리기도 하고, 또 물속에 집어 넣어버린다고 합니다. 돈까지 받아 놓고 왜 저러나?”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로 하여금 그 고통을 견디게 하면, 수영을 배우게 됩니다. 고통을 인내하는 힘과 수영하는 힘이 길러진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면제시켜 주는 데만 익숙해진 아이는 수영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인내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로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소망을 더욱 붙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방수 시계는 실제 물속에 넣어 보아야만 방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론으로만 방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스바 여러분, 환란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인내는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믿음으로 연단을 잘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더 분명해지고, 확실해집니다. 환란은 결코 파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소망을 붙들게 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통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환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환란 중에 있는 지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이미 받은 화평과 은혜의 보좌로 들어가는 축복과 고난 중에 영광의 소망을 허락하신 은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미스바가 되길 바랍니다.

이 땅에는 영원한 소망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품고, 모든 일에 믿음으로 승리하는 미스바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하나님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환란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욱 영광의 소망이 분명해집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얻은 것에 대하여 늘 감사하는 미스바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나눔/ 예수, 늘 함께 하시네

 

1. 만약(*10) 우리 집이 현대나 삼성그룹의 재벌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가질 것인가?

 

 

2. 세상 사람들이 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왜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3. 바울은 우리들에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5:2)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기업의 회장을 만날 수도 전화통화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온 우주의 창조주 되시기고, 전능자 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특권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이것이 특권이며,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을 하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특권을 당신은 사용하고 있는가?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자라고 다시 선포하고 있다. 이 말씀이 은혜로 여겨지는가?

 

 

4.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주어졌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5:2).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 삶인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던, 생각을 하지 않던 우리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은 정말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을 주는 영광이고, 그 영광이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이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이 영광의 소망을 믿음으로 붙잡기 시작하면, 어떠한 환경과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5. 우리에게 환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는 영원한 소망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품고, 모든 일에 믿음으로 승리하는 미스바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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